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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사찰] 의성 고운사

 


 “꿈속조차 욕심 없는 나그네 이제야 올라 왔네” 

“누각은 위태롭게 물 위에 낡은 기둥 드러내는데 
꿈속조차 욕심 없는 나그네 유월에야 올라 왔네 
하늘에 잇닿은 푸른 나무는 맑은 기운 공양하니 
갓끈에 묻은 먼지 부끄러워 맑은 물에 씻는구려” 

- 조선 중기 학자 동계 권도(權濤)의 ‘가허루에서’

 

 



의성 고운사 연수전(延壽殿)과 만세문(萬歲門). T자형의 전각으로 작고 단아하게 지어진 연수전 3면엔 조선 고종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글이 적혀 있고, 만세문은 궁궐 대문 형태의 ‘솟을삼문’으로 격식과 권위를 나타냈다.


1918년에 오시온(吳始溫)이 지은 <등운산고운사사적비(騰雲山孤雲寺事蹟碑)>에 “등운산은 소문현의 북쪽에서 가장 웅장하고 봉우리와 계곡이 지극히 아름답다. 신문왕 원년(681)에 고운사(高雲寺)를 창건하였다. 이어서 고운(孤雲) 최치원이 여지(如智)·여사(如事) 두 분 스님과 함께 가운루와 우화루를 세웠으며, 사찰 이름을 그의 호를 따서 고운사(孤雲寺)로 바꾸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제소요영(御製逍遙詠)>에 “외로운 구름이 하늘 밖에 있다(孤雲漢外)”, 또 주(註)에 이르길 “진리를 얻어 유유자적하니 범속한 경계를 초월하여 티끌세상을 벗어난다. 이는 땅에서 하늘로 나아가 멀리 외로운 구름과 같은 것이다” 하였으니, ‘고운소한외(孤雲漢外)’에서 ‘고운(孤雲)’을 따 온 것이 더 불교적이다. 그래서 그럴까? 고운사는 티끌세상을 벗어난 곳으로 인근 민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고요하고 호젓하다. 필자가 중학교 다닐 때 아버지를 따라 한참을 걸었던 고운사 옛길은 정말 호랑이가 나올까 봐 괜한 걱정을 했던 수풀 우거진 아름다운 길이었다. 

가운루(駕雲樓). ‘허공에 뜬 누각, 가허루(駕虛樓)’로 불리기도 했다.
다른 사찰에선 볼 수 없는 가운루 

고운사에는 극락전, 대웅전, 약사전, 명부전 등 많은 전각이 있다. 이 가운데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전각인 가운루와 연수전을 눈여겨보면 좋을 것 같다. 일주문을 지나 첫 모퉁이를 돌면 누각이라기보다는 개울을 건너는 다리인 가운루(駕雲樓)가 나타난다. 원래 ‘허공에 뜬 누각’, 가허루(駕虛樓)라 불렀다. 조선 영조5년(1729) 평해군수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이 찬술한 고운사 사적비에 “가허루는 극성스님이 지었다. 누각은 거듭 산골 물이 합류하는 절 앞에 세웠는데 기둥은 열을 지어 양 언덕 사이에 서 있다. 공중을 가로질러 푸른 하늘 위에 걸쳐 있는 듯 높고 험하며 탁 트이고 또한 밝아 무릇 신선이 누각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옛날의 가허루는 남쪽 대웅전과 북쪽 극락전을 연결하여 진입을 원활히 할 뿐만 아니라 주변 암자를 하나의 사원 구역으로 이어주는 가교(架橋)로서 큰 역할을 했다. 주변과 어울리는 누각을 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옛날 스님들은 항상 자연과의 조화를 생각한 후 집을 지어 더욱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었으니 시가 절로 나올 수밖에. 조선 중기 학자 동계 권도(權濤, 1575~1644)는 가허루를 이렇게 노래하였다. 

‘가허루에서(題駕虛樓)’ 

“누각은 위태롭게 물 위에 낡은 기둥 드러내는데(危樓跨水敞雕楹) 꿈속조차 욕심 없는 나그네 유월에야 올라 왔네(六月登臨客夢淸) 하늘에 잇닿은 푸른 나무는 맑은 기운 공양하니(碧樹連天供爽氣) 갓끈에 묻은 먼지 부끄러워 맑은 물에 씻는구려(淸流瀉玉愧塵纓)” 

마음을 정화시키는 맑은 계곡, 허공을 나는 누각도 옛사람의 호사스러움이었을까? 가운루는 주변의 도로와 다리, 건물로부터 포위당하고 계곡은 배수구 속에 묻혀 오간 데 없어 갇힌 신선처럼 초라하기 그지없다. 만약 다시 옛 모습을 찾는다면 구름이 다시 누각 위를 날고 신선이 된 최치원이 내려오는 기쁨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가운루는 계곡 위에 세워져 개울을 건네주는 다리이면서도 누각 형태의 건물이다. 전면 2칸, 측면 5칸 팔작지붕의 누각으로 길이 16.2m에 높이가 최고 13m로 대략 아파트 5층 높이와 맞먹는다. ‘V’형 협곡에 세우다 보니 누각의 기둥은 계곡 중앙으로 들어갈수록 길어져 계곡 바닥의 지형에 따라 들쭉날쭉하다. 기둥은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을 계곡에 세워둔 듯 흐르는 물소리에 부딪혀 천상의 소리가 들린다. 

누각 아래는 18개의 가늘고 긴 기둥이 3쌍으로 6열을 지어 계곡 밑바닥까지 내려가 커다란 누각을 떠받치고 있다. 전면과 후면은 출입문을 설치하였으며 측면의 가운데 3칸은 판문을, 나머지 2칸에는 판벽을 설치하였다. 처마를 받치는 4개의 활주는 누하주 귓기둥에 연결하여 힘을 받도록 하였다. 


고운사에는 또 다른 볼거리가 있는데 연수전(延壽殿)과 만세문(萬歲門)이다. 연수전은 조선 고종황제 51세 때인 광무6년(1902)에 황제의 장수를 송축(頌祝)하는 기도 전각으로 낮은 돌담장으로 둘러져 있어 특별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연수(延壽)는 연년익수(延年益壽)에서 나온 말로 사람의 수명을 더 오래 늘려감을 말한다. 그러기에 출입문은 수명이 만세까지 이어지길 바라는 의미에서 만세문이라 했다.

특히 고운사 터는 등운산의 주봉이 수봉(壽峰)으로 목숨이 장수하는 봉우리이고 동·남·북이 산으로 둘러싸고 서쪽으로만 열린 이른바 연꽃이 반쯤 핀 부용반개형(芙蓉半開形)의 명당자리이다. 이러한 명당에 세워진 연수전은 T자형의 전각으로 작고 단아하게 지었다. 벽면과 천장은 온통 용들이 꿈틀거리고, 봉황이 난다. 3면 벽에는 “‘용루만세(龍樓萬歲)’ 용의 누각은 만세에 이어지고 ‘봉각천추(鳳閣千秋)’ 봉황의 집은 오랫동안 지속된다. ‘수여산장불로(壽如山長不老)’ 목숨은 산과 같아 늙지 않고 장수한다”는 고종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글이 적혀 있다. 

만세문은 솟을삼문으로 궁궐 대문의 형태를 따라 어간은 솟아오르게 하여 격식과 권위를 나타내었다. 문의 앞뒤에는 사다리형 초석 위에 기둥을 올리고 이것을 들보로 연결하여 지붕을 올렸다. 대문은 기둥 사이에 문설주를 설치하고 여기에 2쪽 판문을 달고 3개의 대문에는 각각 태극으로 장식하였다. 문 위에는 홍살대와 귀면을 조각하여 한층 위엄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백성을 하늘로 알고 오직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가졌더라면 왜 나라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였겠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암튼 고운사는 진리를 얻어 유유자적할 만한 호젓한 곳임은 틀림없다. 

고운사 일주문.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