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신륵사는 여강과 봉미산 솔숲이 우거진 아름다운 절이다. 보제존자 나옹선사의 사리를 모신 봉미산(鳳尾山)은 봉황의 꼬리에서 나오는 기운이 발산하는 곳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고 한다. 이곳에 있는 부도, 부도비, 부도 앞 장명등은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원효대사, 7일 기도로 아홉 마리 용 승천시키고 …”
“보제존자는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영특하고 수려하여 공손한 그 모습은
의심이 있는 자에겐 의문을 풀어주고
믿음이 있는 자에겐 더 신심을 굳게 한다
이것이 천년을 두고 공경심을 일으키는
이유가 될 것…집을 지어 형상을 모시고
석종을 만들어 사리를 봉안하니
대부분 찾아오지 않는 이 없을 것이다”
- 목은 이색 ‘나옹선사 부도비문’에서
여주 신륵사는 시원한 강바람과 봉미산의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힐링하기에 좋은 사찰이다. 신륵사 창건설화에서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7일간 기도로 연못에 살던 아홉 마리 용을 승천시키고 절을 지었다고 한다. 또한 고려 고종 때 강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사나워 사람들이 불안했는데 이때 인당대사가 용마의 굴레(勒)를 잡아 신력(神力)으로 용마를 다스렸다고 해서 신륵사(神勒寺)라 했다고 전한다.
다층석탑 기단석에도 용 조각
특히 신륵사는 고려 말 나옹선사가 이곳에서 입멸 후 명성을 얻게 되어 우왕 5년(1379) 크게 중건됐다. 조선 예종 1년(1469) 세종의 왕릉을 경기도 광주에서 여흥으로 옮긴 후 정희왕후 윤씨는 성종 4년(1473) 절을 크게 중수하고 이름도 보은사(報恩寺)로 고쳤으며,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된 것을 현종 12년(1671), 정조 24년(1800), 철종 9년(1858)에 크게 중수했고 다시 신륵사로 부르게 되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 ‘여주 불우 보은사’편에 “세조대왕이 부왕의 능 밑에 사찰을 지으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죽자 정희왕후 윤씨가 능 가까운 곳에 절을 짓게 했다. 한명회가 아뢰기를 “국내에는 능에서 가까운 곳에 절을 세울만한 곳이 없습니다. 신륵사는 일명 벽절(벽돌로 만든 전탑이 있어)로 능과 거리가 매우 가까워 종소리, 북소리가 들릴만합니다. 만일 이것을 수리하면 일은 반이라도 공은 갑절이나 될 것”이라고 했다. 이때 조성한 흰 대리석 다층석탑은 보물로 기단석 네 면에는 신령스러운 기운이 뻗치는 가운데 왕을 상징하는 힘찬 용을 조각하여 왕실이 불교를 받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여겨진다.

극락보전은 보물로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정조 24년(1800) 새로 지었는데, 장대석의 높은 기단과 지붕을 크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이는 건물의 격식을 높여 왕실의 보호를 받는 조선시대 불교 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부에는 광해군 2년(1610)에 조성된 보물 목조 아미타 삼존불상을 모셨는데 삼존불의 상호와 상체가 긴 편이다. 특이한 것은 아미타불의 육계가 높이 솟아 신령스럽게 보인다.
근엄과 해학 통해 소통 찾아낸 안목
또한 광무 4년(1900)에 제작된 아미타 후불화는 해학적인 모습이라 재미있다. 보살과 사천왕, 제석, 범천 등이 부처님을 에워싸고 부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겠다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열심히 경청하는데 어라! 부처님 뒤쪽의 아라한들이 장난을 치네? 선생님 몰래 그림책을 펼쳐놓고 서로 키득거리는 학생처럼 딴전을 피운다. 한 아라한이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대나무 그림을 펼쳐 보이니 주변 아라한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보여 달라며 손으로 머리를 밀거나, 잘 안 보인다고 머리를 손가락으로 치는 등 천태만상이다. 맨 뒤에는 애초부터 부처님 말씀에는 관심이 없었던 팔부중은 이내 눈길을 그림 쪽으로 옮긴다. 부처님의 위의(威儀)에 중생들이 주눅 들까 염려되어 이런 해학적인 멋을 부린 것일까? 굴레와 속박을 벗어난 아라한의 파격적인 행동은 웃음을 던져주고 있다. 근엄과 해학을 통해 소통을 찾아낸 조상들의 안목이 놀랍다.

백성들 존경 받은 나옹선사
신륵사 조사당에는 신륵사를 유명하게 만든 나옹스님의 형상과 지공, 나옹, 무학 3화상의 진영을 모셨다. 조사당은 보물로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작고 날렵한 팔작지붕 다포식 건물로 대들보가 없는 것이 특색이다. 조사당 앞 무학대사가 심었다는 수령 600년이 넘은 향나무에는 항상 향불이 타고 있는 듯하여 스승에 대한 공경심을 보여준다. 나옹선사는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아 1371년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으나, 우왕의 왕명에 의해 1379년 양주 회암사에서 밀양 영원사로 추방되어 가던 도중 신륵사에서 입적하여 사리를 신륵사, 회암사, 영전사에 각각 봉안하였으며 무학 등 법을 이은 제자가 48명이나 되었다.
보제존자 나옹선사의 사리를 모신 봉미산(鳳尾山)은 봉황의 꼬리에서 나오는 기운이 발산하는 곳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이곳에 있는 부도, 부도비, 장명등은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나옹선사 부도는 얇은 돌을 깔고 넓은 석축을 쌓은 뒤 낮은 네모 모양의 기단 위 2단의 받침대를 두고 그 위에 부도를 안치하였다. 대리석을 사용한 부도비문은 명문장가 목은 이색이 지었는데 나옹선사의 모습과 부도를 모신 이유 그리고 신륵사의 영원성을 담고 있다.
“보제존자는 여흥(여주의 옛 지명)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영특하고 수려하여 공손한 그 모습은 의심이 있는 자에겐 의문을 풀어주고 믿음이 있는 자에겐 더욱 더 신심을 굳게 한다. 이것이 천년을 내리 두고 공경심을 일으키는 이유가 될 것이다. 집을 지어 형상을 모시고 석종을 만들어 사리를 봉안하니 대부분 찾아오지 않는 이 없을 것이다. 신륵사는 보제존자께서 크게 도를 펴던 곳으로 장차 영원히 무너지지 않으리라. 또 이 강과 저 달도 더불어 한없이 오랠 것”이라고 했다. 납재석을 사용한 부도 앞 장명등의 8각 연꽃 기둥은 반룡을 양각하고 창문 사이에는 비천상을 아름답게 조각한 화려한 석등이다.
대장각비 그리고 유일 고려 다층전탑
동쪽 산길로 내려가면 보물인 대장각비가 있다. 이 비는 이색이 우왕 9년(1383) 개성 영통사에서 대장경판을 제작하여 신륵사 대장각에 모신 것을 기념해 세운 비이다. 비문에서 “남산총공스님은 이색의 아버지 가정 이곡에게 공이 지금 진실로 우리 부처님 법으로써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한다면 어찌 대장경 한 부를 간행하지 않으십니까? 우리 부처님의 모든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색이 공민왕의 명복을 빌고 아버지의 뜻을 계승하여 나옹선사 제자들의 도움으로 임술년(1382) 4월 절 남쪽에 대장각을 세우고 대장경판을 봉안했다. 이렇듯 충효가 절절히 배어있는 대장경판 전부를 태종은 일본 국왕에게 보내 버렸다.

계단을 내려오면 여강 강기슭에 우뚝 솟은 고려시대 유일한 벽돌 탑인 보물 다층전탑이 있는데 벽돌마다 넝쿨무늬를 넣은 아름다운 전탑이다. 이 전탑으로 인해 벽사(寺)란 이름이 생겼다. 여기서 바라보는 강 언덕 풍광은 아름답다. 강원도 영월 쪽에서 뗏목을 싣고 물길을 따라 한강으로 가는 뱃사공들은 멀리서 이 전탑을 보면 안전한 뱃길을 부처님께 빌었다고 한다. 보제존자 나옹선사가 여강과 달그림자로 계신 신륵사는 강과 솔숲이 우거진 아름다운 절이다.
[불교신문 3718호/2022년5월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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