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불교교리와법문

무각스님 / 금강경 법회인유분 中

그 때 세존께서는 공양 때가 되어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걸식하고자 사위대성에 들어가셨다. 성 안에서 차례로 걸식하신 후 본래의 처소로 돌아와 공양을 드신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爾時 世尊食時 着衣持鉢 入舍衛大城 乞食 於基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 <금강경>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중에서

 



‘자등명 법등명’과 일맥상통

 부처님의 공양은 시작과 끝이 여여하고

 일체가 부처님과 다르지 않음을 일러줘


<금강경>이 시작되는 이 한 문장 속에는 <금강경>의 핵심이 드러나 있다. 부처님께서 보이시는 걸음걸이와 모든 행위는 진리와 법을 상징하며, 중생을 깨우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부처님께서 공양하러 가는 길은 중생을 제도하러 가는 길이다. 가사와 발우는 법을 상징하고, 성에 들어가는 것은 경계의 바다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가사와 발우는 삶의 나침반이며, 전쟁터의 갑옷이자 무기이다. 일체의 경계 속에서 법을 의지하지 않고 어떻게 생사의 큰 파도를 넘을 수 있겠는가. 부처님께서는 법에 의지하고 자성의 부처에 의지하라는 가르침을 말 대신 행으로 설하신 것이다. 이는 ‘자등명 법등명’하라는 부처님 유언과도 일맥상통한다.

부처님께서는 차례로 걸식하면서 불교적 삶의 자세를 보여줬다. 좋은 음식이든 거친 음식이든 가리지 않고 공양을 받았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취사선택하지 않은 것은 어떤 경계가 닥쳐도 분별없이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이다. 누구나 인생을 살다보면 희로애락을 겪는다. 역경계가 찾아올 때도 있고 순경계를 맞을 때도 있지만 모두 지나가는 손님이요, 경계인 줄 알고 끌려 다니지 말아야 한다.

이미 2600년 전에 부처님께서는 법답게 사시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런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불교의 문제를 보자. 종교편향, 대정부간 관계 등이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면서, 불교가 많이 위축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우리가 부처님 법대로 살지 못한 탓이 크다. 부처님처럼 법을 들고 경계를 해소했다면 세간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을 것이다. 결국 우리의 문제인 셈이다. 자기 공부에 마음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

불자들도 마찬가지다. 공부하는데 관심 없고 복만 구하다보니 부처님 가르침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공부하면 공덕이 쌓이듯 복이 저절로 갖춰지는데 본말이 전도된 게 오늘날의 현실이다. 출가자가 공부를 통해 힘을 기르면 중생제도도 저절로 된다. 사람들 역시 불법에 의지하려고 할 것이고,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다. 불자 역시 부처님 가르침대로 산다면 역경계 순경계를 무난히 이겨낼 수 있다.

이처럼 부처님의 공양은 시작과 끝이 여여하고, 일체 모든 존재가 부처님과 다르지 않음을 일러주기 위함이었다. 가사와 발우를 가지고 성에 들어 걸식하고 처소에 돌아와 공양을 마치신 모습까지 일체중생에게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



무각스님 / 서울 공생선원장

[불교신문 2690호/ 1월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