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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37.동고문성

 

37.동고문성

감찰원장을 여러 차례 지내며 종단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던 동고문성(東皐汶星, 1897~1997)스님. 수행자의 위의를 잃지 않고 정진한 우리 시대의 스승인 문성스님은 은사인 대강백 서응스님과 만해스님의 영향을 받아 친일승려를 척결하는 등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 문성스님의 삶을 제자 수진스님(부산 해인정사 주지.전 해인사 강주)의 증언을 통해 재구성했다.

 

 

“계율 청정해야 ‘깨달음의 집’ 지을 수 있어”

            

  만해스님 영향으로 ‘친일불교 척결’ 운동

  휘문 축구선수로 활약 · 정화불사도 참여

 

○…문성스님 생애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대사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조선 전체를 경악시켰던 ‘친일승려 강대련의 명고축출(鳴鼓逐出)’ 이었다.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귀속시키려 했던 강대련을 뜻을 같이한 도반들과 ‘대망신’ 시켰던 것이다. 1922년 본산주지회의에 참석하려는 강대련을 체포해 종로거리를 돌면서 북을 치고 ‘불교의 악마’라며 각성과 참회를 촉구했다. 당시 문성스님을 비롯한 젊은 스님들은 강대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본사 소임을 보고, 일본인들과 관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겠지만, 조선불교를 왜국에 넘기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조선불교를 망치려는 ‘불교의 악마’가 아니면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스님들은 전원 연행됐으며, 서대문 형무소에 구금된 문성스님은 4개월 만에 집행유예로 출소했다.

<사진설명> 천수를 누리며 평생 수행자의 기상을 잃지 않았던 문성스님. 노년에 부산 관음정사에 머물 무렵 파안대소하는 스님. 제공=부산 해인정사 수진스님

○…일제강점기 휘문고보(지금의 서울 휘문고)를 다닌 스님은 축구선수로 맹활약했다. 고보 졸업 후 일본 와세다대에 ‘축구특기생’으로 입학했을 만큼 명성을 날렸다. 1920년대 초반 평양에서 열린 축구대회에서 레프트 윙(left wing)을 맡은 스님은 운동장을 종횡무진 누볐다. 상대팀은 축구명문 숭실고보였다. 박빙의 대결이 펼쳐져 어느 팀도 골을 넣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갔다. 후반전을 10여분 남겨놓은 순간 상대 진영에 깊게 파고 든 스님의 어시스트를 받은 선수가 20여 미터 중거리 슛으로 한골을 뽑았다. 순간 운동장은 휘문의 환호성과 숭실의 탄식이 쏟아졌다. 흥분한 양측 응원단의 소란으로 경기는 중단됐고, 밤늦게야 남은 경기를 마칠 수 있었다. 우승컵도 평양 YMCA에서 전달 받았다고 한다. 석전 박한영스님의 전강제자로 중앙고보를 졸업한 운기스님은 수진스님에게 “너의 은사스님이 축구를 참 잘했다”고 했다. 또 문성스님도 생전에 “그때 받은 메달이 있었는데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이보게. 차 좀 내오게” 손님이 찾아오자, 만해스님이 문성스님에게 차를 내오도록 했다. 만해스님이 통도사에 머물 때 문성스님이 1년간 시봉을 한 적이 있다. 이때 만해스님은 “자네 손을 거친 작설차 맛이 좋다”면서 차 심부름을 많이 시켰다. 또한 만해스님은 ‘六穴包三發(육혈포삼발) 勝於讀千卷(승어독천권)’이라는 내용의 강의로 통도사의 젊은 학인들에게 의기(義氣)를 북돋아 주었다. 문성스님은 만해스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이후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도 이 같은 인연에서 비롯됐다.

○…문성스님은 은사 서응스님에게 32마지기에 이르는 농토를 물려받았다. “공부하는데 사용하라”고 받은 농토였지만, 문성스님은 그 마저 욕심을 물리쳤다. 해방 후 농지개혁 당시 아무 미련 없이 30마지기에 이르는 농지를 농민들에게 댓가 없이 나눠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남은 2마지기는 당신을 시봉한 제자에게 넘겨주었다. 평생 청빈하게 살았던 스님의 삶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이다. 또한 스님은 20여 년간 부산 마하사 주지 소임을 보았지만, 당신을 위해 축적한 사유재산이 전혀 없었다. 마하사에서 다른 절로 주석처를 옮길 때 통장 하나 없었다고 한다.

○…문성스님이 부산에 머물 때 많은 수좌들이 찾아왔다. 공부하겠다고 온 수좌들을 스님은 누구보다 따뜻하게 맞이했다. 그러나 예불에 참여하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지고 말았다. “예끼 이사람, 불제자로서 기본이 안됐으니 그만 떠나게.” 수행자로서 예불은 기본이라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었다. 예불에 빠지면 부처님 제자가 아니라고 했다. 

○…문성스님은 대중과 발우공양을 하면서 소참법문을 자주 했다. 이때 스님은 “시은을 중요하게 생각하라. 그리고 승려의 규범인 계율을 잘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주는 도(道)를 닦는 근원이야. 시은(施恩)이 없으면 도를 닦지 못하니, 출가자들은 시주의 은혜를 무서워해야 돼. 수행을 해서 도를 구해야 하는데, 그 은혜를 모르면 안 되는 것이야.” 계율을 청정하게 지킬 것도 강조했다. “승려는 계율이 우선이야. 계율을 지키지 못하면 허공에 집을 짓는 것과 똑 같아.”

○…종단 감찰원장을 수차례 역임한 스님은 “율법을 준수하고 계율이 청정해야 ‘깨달음의 집’을 지을 수 있다”면서 “그것이 바탕이 되어야 깨달음이 목전(目前)에 있다”고 지적했다. 청담스님과 함께 정화불사에 참여했던 문성스님은 종단의 기강이 무너지는 것을 염려하며 후학들의 정진을 당부했다. “종단이 반석(盤石)에 있으려면, 출가자들이 율법(律法)을 잘 지켜야 한다. 대처승들이 결혼했다고 정화를 했는데, 우리가 대처승처럼 살면 안 된다. 중이 결혼해서 처자식을 거느리고 살아서야 되겠는가. 우리가 교단을 정화했는데 대처승처럼 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세수 90세를 넘겼을 때. 문성스님은 부산 관음정사에 주석하고 있었다. 햇볕이 따뜻하게 내려쬐는 날, 스님은 손수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당신을 시봉하는 상좌를 시켜도 되고, 아니면 공양주 보살에게 맡겨도 될 일이지만. 스님은 직접 바느질을 했다. 평생 남의 신세를 지지 않고, 당신 일을 스스로 했던 스님의 면모를 알 수 있다. 또 노구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시력을 비롯해 건강이 좋았던 것이다. 이밖에도 스님은 직접 비질을 하고, 돋보기 없이도 신문을 읽는 등 잠시도 방일하지 않았다.

○…어느 날 선방에 다닌다는 한 수좌가 문성스님을 찾아왔다. 몸은 비쩍 말랐고, 얼굴빛이 파리했다. 수좌가 스님에게 인사를 드린 후 질문이 오갔다. “젊은 수좌가 어찌 왔소.” “큰스님께 여쭈어 볼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그래, 말해 보시오.” “제가 선방을 다니면서 참선을 하다가 ‘참선병(參禪病)’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요.” “정진도 잘 되지 않고, 화두를 드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어, 그래요.” “몸도 안 좋아졌습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이런 저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이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다른 곳에서 찾지 말고, 바로 그곳에서 해답을 찾으시오.” “…” “정진을 하다 얻은 병이니, 정진을 하여 고치도록 하시오.”

○…“이보게, 문을 닫어.” “예, 스님 무슨 말씀이신지요.” 시봉하는 상좌가 당신 방에 들어오자, 문성스님은 문을 잠그도록 했다. “나하고 씨름 한판 하자.” 세수 80세를 넘긴 스님이었지만 젊은 상좌에게 씨름을 하자고 했을 만큼 누구보다 천진난만했다, 젊은 시절 축구선수로 활약했던 스님이었지만, 젊은 상좌를 당할 수는 없었다. 상좌에게 씨름을 진 며칠 뒤 스님은 다시 “이봐, 씨름 한번 더하지”라며 시합을 요구했다고 한다. 제자가 못이기는 척 져 주면 스님은 “으음. 그렇지”라며 동자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학인들이 몇이나 된다고요.” “예, 스님 150여명 됩니다.” “아, 그래요. 열심히 지도하세요.” 상좌 수진스님이 합천 해인사 강주 소임을 맡은 후 문성스님은 말을 놓지 않았다. 세수도 차이가 많이 났고, 당신 상좌지만 강주라는 소임을 맡은 이상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성스님의 생각이었다. 제자가 “스님, 말을 놓으셔야 제가 편합니다”라고 해도, 문성스님은 “아니요. 산중의 소임은 나이가 많고 적음에 있지 않소. 세속 나이 보다는 소임에 따라야지요.” 문성스님은 해인사 강주 소임을 맡은 수진스님에게 이런 당부를 했다. “나를 걱정하지 말고, 해인사 학인들을 위해 산중에서 어떻게 대중들과 살아야 하는지를 우선하시오.”

 

 

행장  

   

강백 서응스님 제자

세수 100세로 입적

1897년 2월 6일 경주시 노서동에서 부친 박형일(朴亨一) 선생과 모친 김해 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속명은 문성(汶星) 부친과 양산 통도사를 참배하러 갔다, 저녁예불 소리를 듣고 출가 원력을 세웠다. 11살에 출가했으며, 1911년 4월 15일 고성 옥천사에서 은사 서응(瑞應)스님에게 사미계를 받았다. 1917년 4월 통도사 대교과를 수료하고, 이듬해 4월 고성 옥천사 선원에서 첫 하안거를 마쳤다. 1919년 4월 진주 호국사에서 호은(虎隱)스님에게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사진설명> 서울 선학원 요사채 마루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문성스님. 천진난만한 모습이다.

1920년 서응스님이 강사(지금의 강주)로 있던 합천 해인사에 머물며 독립운동을 주도했다가 김천 수도암으로 몸을 피했다. 1926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지만 독립운동 참여와 강대련 명고축출 사건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했다. 이후 수행에 몰두, 1929년 금강산 마하연에서 하안거 정진을 한 스님은 묘향산 보현사,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 해남 대흥사 등 남북의 명찰을 돌며 안거를 했다. 1932년 고성 옥천사에서 정진 하던 스님은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했다.

1947년 고성 옥천사 백련암선원에서 6년 결사 정진을 하던 스님은 한국전쟁 발발후 서옹.성철.청담스님과 함께 안거를 했다. 스님은 재무부장, 비상종회의원, 비상종회 의장, 초대 감찰원장, 초대 종회의원을 역임하며 정화불사에 참여하는 한편 종단이 제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소임을 원만하게 보았다. 1972년 감찰원장에 다시 취임했다 1974년에 사임한 후 부산 마하사와 관음정사에 주석하며 여생을 보냈다. 이때 스님은 방 앞에 ‘隱遁室(은둔실)’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1978년 원로의원으로 추대된 스님은 1997년 부산 관음정사에서 은둔실에서 임종게를 남기고 원적에 들었다. 세수 100세, 법납 86세였다. 스님 부도와 비는 양산 통도사에 봉안돼 있다.

 부산=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불교신문 2475호/ 11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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