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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34.용악혜견

 

34.용악혜견

 

 

 

 

조선 건국 당시 창건된 안변 석왕사에 머물며 팔만대장경 유포의 원력을 갖고 남방으로 주석처를 옮긴 용악혜견(龍岳慧堅, 1830~1908)스님. 용악스님은 <금강경> 10만 편을 암송하는 등 교학을 깊이 공부했으며, 지극정성으로 수심(修心)하여 깨달음의 향기를 널리 전했다. 용악스님의 삶을 순천 송광사에 있는 비문과 <용악집> 등을 참고해 정리했다.

 

 

“산과 바다 같은 원력으로 ‘깨달음의 성’ 넘는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인경불사 원력 성취

‘금강경’ 10만편 독송 등 수행정진 귀감

○…용악스님의 신심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간절한 기도와 간경은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다. 특히 <금강경> 10만 편(遍)을 암송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지극정성으로 <금강경>을 암송한 결과 스님 치아에서 사리 1과가 출현했다고 한다. 하지만 스님은 사리가 나온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바위틈에 숨겼다. 오직 수행정진에만 몰두 했던 스님의 성품을 대변하는 듯하다.

○…세수가 18세 되던 해의 어느 날 스님은 꿈을 꾸었다. 오산(梧山) 수암사(水巖寺)에서 맑은 차를 마시는 꿈이었다. 너무 생생하여 좀처럼 잊혀지지 않았다. 더구나 매해 같은 날 똑같은 꿈을 꾸었으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몇 해가 흘렀다.

<사진> 팔만대장경 인경불사로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하고자 했던 용악스님 진영. 밀양 표충사에 봉안되어 있다. 출처=표충사 호국박물관 刊 ‘깨달음의 모습’

오산에서 온 객(客)스님이 방부를 들였다. 같은 꿈을 반복해 꾸었던 스님은 그동안 궁금했던 내용을 물었다. “오산에 수암사라는 절이 있는지요.” “제가 있던 도량이 바로 오산 수암사입니다” 반갑고 신기한 마음에 스님은 꿈에서 본 수암사의 경치를 설명했다. 공양간이 어디에 있는지, 수곽(우물)의 위치는 어디인지, 꿈에서 본 그대로 이야기했다. 놀란 표정의 객스님이 답했다. “스님께서는 어찌 그렇게 상세히 아십니까. 혹시 그곳에 머무셨던 적이 있는지요?”

○…용악스님은 궁금한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당신이 수암사 꿈을 꾼 날이 매년 같았던 것이다. “내가 꿈을 꾼 모월모일, 수암사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날은 수암사를 중창하신 스님의 기제사 날입니다.” “그래요. 그 스님께서는 살아계실 때 어떤 원력을 갖고 계셨나요.” “그 스님은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보는 것이 원이셨습니다.” 용악스님도 평소 같은 원력을 갖고 있었다. 신기한 인연임을 알게 된 용악스님은 팔만대장경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고민했다. 그 후 스님은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인경불사(印經佛事) 원력을 구체화 했다.

○…평생 팔만대장경의 인경불사 원력을 잊지않은 스님은 66세 되던 해 안변 석왕사를 나와 남방으로 향했다. 우선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영축산 통도사에서 인경불사의 원만성취를 기원하는 기도를 하기로 했다. 이때가 1896년 12월 20일(음력)이었다. 배를 타고 동해를 거쳐 부산에 도착했다. 석왕사를 나와 부산에 도착하기 까지 보름의 시간이 소요됐다.

한편 용악스님이 통도사에 도착하기 전날, 당시 통도사 승통(僧統) 소임을 맡은 스님은 어떤 스님이 산문(山門)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다음날 해가 질 무렵 일주문으로 낯선 노스님이 들어왔는데, 그 스님이 바로 용악스님이었다.

○…용악스님은 통도사에 도착한 후 적멸보궁에서 100일 기도를 했다. 기도 입재일은 1897년 1월15일(음력)이었다. 한 달 정도 지난 후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2월17일(음력) 저녁에 금개구리 한 마리가 나타나 불기(佛器)위에 올라가 앉는 것 이었다. 이를 본 용악스님이 합장하고 해인사 팔만대장경 인경불사의 원력을 고(告)하자, 금개구리는 조용히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더욱 기도정진에 전념한 스님은 4월25일 100일 기도를 회향했다.

○…양산 통도사에서 100일 기도를 마친 스님은 팔만대장경이 봉안돼 있는 합천 해인사로 향했다. 사실상 교통편이 전무했던 시절, 오직 걸어서 해인사로 갔다.

60대 후반의 노구(老軀)를 이끌고 18일이 걸려 해인사에 도착했다. 이때가 1897년 5월13일(음력)이었다. 스님은 해인사에서 다시 100일 기도를 올렸다. 70일이 지난 7월25일 초저녁에 스님은 복행신장(腹行神將)이 나타나는 상서로운 일을 경험했다. 이에 스님은 팔만대장경 인경불사의 원력을 다시 고(告)했다고 한다.

<사진> 용악스님이 쓴 통도사 황화각 상량문의 일부

이 같은 지극한 기도와 정성은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원력이 성취된 것이다. 1898년 5월에 대장경 인출(印出)을 허가하는 고종의 윤지(允旨)가 내려왔다. 이에 스님은 대장경 4질을 인출하여, 세 질은 삼보사찰에, 나머지 한 권은 당시 강사스님들이 나누어 독송하도록 했다고 한다.

○…구하스님은 <용악당사고집(龍岳堂私藁集)> 서문에서 용악스님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 스님은 관북 석왕사가 본사로, 생각이 무리 가운데 빼어나고 지혜가 대중 가운데 뛰어나셨으며,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으로 일상의 공부를 삼으신 한 분의 거룩한 승보이셨다. 나라를 복되게 하고 세상을 도우며, 전쟁이 없어지고 재난이 영원히 사라져 온 백성들이 모두 즐거워하고, 때맞추어 단비가 내려 해마다 풍년이 들어 조정과 백성이 태평하고, 여러 관리들이 제각기 맡은 직분을 다하여 온갖 물산이 풍요롭기를 바라서, 조정으로부터 물자를 도움 받아 해인사의 대장경을 인출하여 봉안하였다.”

○…<용악집>에는 ‘歎偶吟(돌탄우음)’이란 자작(自作) 시가 실려 있다. ‘애석해 하며 읊다’라는 이 한시에서 용악스님은 부질없는 삶에 집착하지 말고 수행 정진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改頭換面無窮日(개두환면무궁일) 飄往他鄕似水輪(표왕타향사수륜) 從前今劫來多劫(종전금겁내다겁) 視後今人亦故人(시후금인역고인) 富宅猶嫌千口富(부택유혐천구부) 貧家長恨一身貧(빈가장한일신빈) 然不記前生事(명연불기전생사) 杳杳茫茫奈也巡(묘묘망망내야순)”

<용악집>에 나온 한글풀이는 이렇다. “머리칼도 얼굴도 변해버린 한 없는 세월 / 오르 내리는 두레박처럼 타향에 떠돌았네 / 앞에서 보면 금생도 다겁 동안 흘러왔고 / 뒤에서 보면 지금 살아 있는 사람도 역시 죽은 사람이네 / 부유한 이는 오히려 천구(千口)의 부귀도 불만하고 / 가난한 집에선 늘 일신(一身)의 가난조차 한탄하네 / 전생의 일을 깜깜하게 기억하지 못해 / 막연히 어쩔 수 없이 떠돌 뿐이네”

○…역시 <용악집>에 실린 ‘自警(자경)’이란 시도 용악스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吾今借問主人者(오금차문주인자) 劫雨藍風幾沒浮(겁우람풍기몰부) 貝葉經文誰盡覽(패엽경문수진람) 華藏刹海我多游(화장찰해아다유) 三千一界生來路(삼천일계생래로) 七十九年死去秋(칠십구년사거추) 欲識箇中常住性(욕식개중상주성) 眞如寂滅道場留(진여적멸도장유) 志願如山海(지원여산해) 期超大覺城(기초대각성)”

<용악집>에 실린 한글 풀이다. “나 지금 주인자(主人者)에게 묻노니 / 겁(劫)의 毘藍風(폭풍)에 얼마나 부침했던가 / 부처님의 경전을 누가 다 보았나 / 화장찰해에 내가 충분히 노닐었네 / 삼천의 한 세계는 살아온 길이요 / 칠십구년은 죽어갈 때인데 / 그 가운데 상주하는 성품을 알고자 하면 / 진여의 적멸도량에 머물러야 하리 / 뜻과 원력이 산과 바다와 같아 / 큰 깨달음의 성을 뛰어넘어 지이다.”

○…1908년 2월15일. 이날은 부처님 열반재일이다. 용악스님이 3년 전부터 어느 날 갈 것이라고 했던 바로 그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용악스님은 통도사 경내에 있는 법당을 차례로 참배했다. 가고 옴이 따로 없는 것이 수행자이지만, ‘마지막 인사’를 드렸던 것이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공양을 마친 스님은 한밤중에 “光陰七十載(광음칠십재)에 / 脫却三千業(탈각삼천업)이라 / 忘我歸眞處(망아귀진처)에 / 從容一理平(종용일리평)이로다”라는 임종게를 남긴 후 조용히 원적에 들었다.

 

행장 /

안변 석왕사 총섭

66세에 남방으로

용악스님은 함경도 함산(咸山)에서 태어났다. 성은 김(金)씨어며 본관은 김해(金海)다. 부친 이름은 김우원(金宇).

어려서 조실부모한 후 13세에 출가한 스님은 안변 석왕사에서 머물며 정진했다. 경전을 공부하고 후학을 지도하던 스님은 안변 석왕사에서 총섭(總攝, 지금의 주지에 해당)을 지냈다. 용악(龍岳)은 법호이고, 혜견(慧堅)은 법명이다.

용악스님은 평소 “평생 <금강경>을 지송(持頌)하고, 정토발원(淨土發願)하며, 숙원(宿願)이 팔만대장경 인간(印刊, 인쇄하여 책을 펴냄)인데 미과(未果, 아직 끝을 맺지 못함)”라고 했다. 66세까지 석왕사에 머물던 스님은 팔만대장경 인경불사의 원력을 갖고 1897년 양산 통도사로 주석처를 옮겼다. 통도사와 합천 해인사에서 100일 기도를 한 후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인쇄해 통도사.해인사.송광사 등 삼보사찰에 각 1부씩 소장하도록 했다. 조정을 비롯해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등 왕실, 남도관찰사, 언양군수, 양산군수 등 지방관료까지 후원금을 내는 등 ‘국가적인 사업’으로 진행됐다. 동원된 인력만 인경승(印經僧) 1000명과 인부(人夫) 1만명이었다고 한다.

용악스님은 이후에는 양산 통도사 장경전(藏經殿) 옆에 주석처를 정하고 <금강경> 독송을 하며 지냈다. 통도사 황화각(皇華閣) 상량문도 용악스님이 직접 작성한 것이다. 스님은 100년 전인 1908년 2월15일 양산 통도사에서 입적했다. 세수 79세. 법납 65세.

1901년 구하(九河)스님이 용악스님의 글을 모아 <용악당사고집(龍岳堂私藁集)>을 펴냈고, 1993년에는 연관(然觀)스님이 번역하고, 석정(石鼎)스님이 발행한 <용악집>이 나왔다. 동국대학교 도서관에는 용악스님의 간찰(簡札, 편지)이 보관되어 있다.

 통도사=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불교신문 2469호/ 10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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