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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32. 진하축원

 

32. 진하축원

조선시대 숭유억불로 희미하게 이어진 불법(佛法)은 인고의 세월을 견뎌냈다. 더구나 나라가 혼란에 빠진 조선후기 불교 상황은 처참했다. 쓰러진 불교를 일으키고 혜명을 잇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진하축원(震河竺源, 1861~1925)스님. 선교율(禪敎律)을 겸비한 스님은 높은 수행력과 뛰어난 교학을 근간으로 후학을 양성했으며, 제자들은 한국불교의 대들보가 되었다. 보은 법주사에 있는 비와 일제강점기 발행된 <조선불교월보> 등의 자료를 참고해 진하스님의 생애를 살펴보았다.

  

 

“조선불교의 혜명이 지금에 이르러 단절됐다”

   

   만해 석전 진응 청호 석상스님 등 ‘지도’

  公私 구별 엄격…“자경자행하며 수행하라”

   

○…1924년 4월에 발행된 <조선불교월보> 3호에는 진하스님이 쓴 ‘일과십상송(日課十常頌)’이란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에서 진하스님은 “자경자행(自警自行)하며 10가지 수행을 일상에서 실천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부처님 제자가 되어 수행정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밝힌 글이다. ‘일과십상송’에서 열거한 평상시 열 가지 수행은 예불(禮佛).염불(念佛).참선(參禪).지주(持呪).공불(供佛).재식(齋食).송경(誦經).소지(掃地).시식(施食).회향(回向)이다. 선교(禪敎)를 겸비한 진하스님이 주력(呪力) 수행을 했다는 점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스님은 준제신주(準提神呪)를 1백만 번이나 지송(持誦)했다.

○…진하스님은 경전을 옮겨 쓰는 사경(寫經) 수행도 많이 했다. <화엄대경 81권>을 10개월에 걸쳐 정성스럽게 사경했는데, 한 글자를 쓰고 한번 절하면서 썼다고 한다. 또한 경전을 서사(書寫)할 때는 역사(逆寫)를 했다고 한다. 역사는 경전을 처음부터 사경하는 것이 아니고, 맨 뒤부터 거꾸로 옮겨 적는 것으로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공부이다.

○…법주사 원장과 주지 등 3차례나 ‘살림’을 책임졌던 스님은 공사의 구별을 엄격하게 했다. 시주물은 반드시 사중(寺中) 재산으로 삼았으며, 공공의 재물을 사사롭게 취하는 것을 금했다. 스님은 받은 여비도 사중에 들여 놓았다. 이에 대해 <조선불교월보>에 실린 ‘오호(嗚呼)! 진하노사(震河老師)!! 그 성승(聖僧)이던가!!!’라는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노사의 속리(俗離)에 주지하였을 때(時)에는 혹(或)이 행신(行, 여행 등 먼 길을 가는 사람에게 노자나 물건을 주는 것)으로서 노사에게 증(贈)하는 자가 있으면, 노사는 필(必)히 차(此)로써 사(寺)에 납부(納付)하였으며 현규(現規)를 역수(歷數, 차례대로 셈하는 것)하면 조선(祖先, 조상)의 유물(遺物)로써 자손계(子孫計, 자손을 위하여 세운 계획)를 삼지 않는 자가 절무(絶無, 전혀 없음)하지마는, 노사는 법물(法物)의 승습(承襲)이 유(有)한 것이면 제족(弟足)에게 유여(遺與)치 아니하고 필히 삼보(三寶)에 헌납하였으니 노사의 호법(護法)과 이욕(離欲)이 그 차(此)에 지(至)하였도다.”

[사진설명] 선교율을 겸비한 진하스님의 진영. 위당 정인보가 찬을 썼다. 출처=보은 법주사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강(講)을 시작한 스님은 17년간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일제강점기 본사 주지 가운데 절반 이상이 진하스님 회상에서 공부했으며, 월화(月華).석전(石顚).진응(震應).만해(萬海).석상(石霜)스님도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만해스님은 진하스님 문하에서 선학(禪學)을 공부했으며, 스승에 대한 글을 남기기도 했다. 제자들은 일제강점기 바람 앞에 선 등불처럼 위기에 빠졌던 조선과 불교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진하스님의 가르침을 계승하려고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이능화는 진하스님에 대해 “회상에서 공부한 제자들을 많이 두었고, 선문(禪文)을 바로 잡았으니 종안(宗眼)이 밝았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진하스님은 뜻을 세우면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불퇴전의 정진으로 깨달음을 성취하는데 만전을 기했다. <조선불교월보>의 글에도 “노사는 고집이 강하여 당장 순종은 긍(肯)치 아니하지마는 구경(究竟)에 택선취장(擇善取長, 착한 것을 택하고 장점을 취함)은 없지 아니한즉 고집(固執)이 즉시(卽是)노사의 행검(行檢,품행이 점잖고 바름)이였다.”

○…스님은 60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중국에 다녀왔다. 뜻은 한 가지. 조선의 계맥(戒脈)이 희미해진 것을 안타까워했기 때문이다. 1912년 중국 절강성 영파부 태백산 천동사(天童寺)에서 열린 기선경안(寄禪敬安)스님의 계회(戒會)에 참여한 후 귀국했다. 법회 이름은 방명계회(放冥戒會)였다. <조선불교월보>에는 천룡사(天龍寺)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하스님은 “조선의 혜학(慧學,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 나아감)이 지금에 이르러 단절된 것을 개석(慨惜, 슬퍼하고 안타까워 함)했다”고 한다. 세수 7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후학을 위해 강의를 맡기로 했다. <조선불교월보>에는 “동학(東鶴)의 청(請)을 수(受)하야 의발(衣鉢)을 선송(先送)하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아마도 동학사 강사(지금의 강주에 해당)를 맡을 예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스님은 선에 대한 당신의 견해를 담은 <선문재정록(禪門再正錄)>이란 저술을 남겼다. 이 책은 긍선(亘璇)스님의 <선문수경(禪門手鏡)>, 의순(意恂)스님의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辯漫語)>, 홍기(洪基)스님의 <선문증정록(禪門正錄)>을 비판했으며, 조선 후기 선논쟁(禪論爭)을 활발하게 일으키는 단초가 됐다. 스님은 이 책에서 여래선과 조사선에 대한 입장을 밝히며 수행종풍(修行宗風)을 일으켰다.

 

행장 /

17년간 강원서 후학양성 진하스님은 1861년(신유년) 1월19일 강원도 고성군 수동면 수잠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서홍구(徐洪九)선생과 모친 변씨(邊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이천(利川)이다. 1872년(임신년) 12살의 어린나이에 금강산 신계사로 출가했다. 이해에 석주상운(石舟常運) 선사에게 사미계를 수지했다. 1884년(갑신년) 금강산 신계사에 벽암서호(蘗庵西灝)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사진설명] 보은 법주사에 있는 진하스님 비.

용호해주(龍湖海珠)스님의 선등(禪燈)을 잇고, 대응탄종(大應坦鐘)스님의 법(法)을 계승한 진하스님은 청허(淸虛)스님의 15세 법손(法孫)이다. 1873년(계유년)부터 1884년(갑신년)까지 간경(看經)과 참선(參禪) 수행을 겸비한 정진에 몰두했다. 1886년(병술년)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강(講)을 설한 후 17년간 후학을 제접(堤接)했다. 1892년(임진년)에 대선법계(大禪法階)를 받았으며 1895년(을미년)에 중덕법계(中德法階), 1911년(신해년)에 선사법계(禪師法階)와 대선사법계(大禪師法階)로 승급했다. 1892년(임진년) 보은 법주사 부교정(副敎正)으로 추대됐으며, 1901년(신축년)에는 법주사 원장(院長)으로, 1911년(신해년)에는 법주사 주지로 선출됐다.

1914년(갑인년)에 다시 법주사 주지 소임을 맡았다. 1912년(임자년)에는 중국 절강성 영파부 태백산 천동사(天童寺)에서 기선경안(寄禪敬案) 종사(宗師)가 연 방명계회(放冥戒會)에 참석했다. 1925년(을축년) 8월6일 오전 2시 제주도 포교당인 아라교당(我羅敎堂)에서 입적했다. 제주에 온지 3일만이다. 세수 65세, 법납 54세. 진하(震河)는 법호이고, 축원(竺源)은 법명이다. 진하스님 회상에서 공부한 제자로는 만해(卍海).석전(石顚).진응(震應).청호(晴湖).석상(石霜) 스님 등이 있다.

진하스님의 비(碑)는 1927년 보은 법주사에 건립됐으며, 진영도 법주사에 봉안돼 있다. 법주사 동종(銅鐘) 아랫부분에 진하스님 법명이 나오는데, 1916년 동종을 중수(重修)할 때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

법주사=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불교신문 2463호/ 10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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