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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30. 경봉정석

 

30. 경봉정석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조국해방,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관통하며 ‘중생들의 정신적 귀의처’ 였던 경봉정석(鏡峰靖錫, 1892~1982)스님. 수행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엄격했지만 한 없이 자애로운 모습으로 대중을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경봉문도회장 원산스님(전 교육원장)의 증언과 경봉스님을 오랫동안 시봉한 명정스님(통도사 극락암 선원장)이 펴낸 <삼소굴소식> 등의 자료를 참고해 경봉스님 수행일화를 정리했다.

  

 

“물처럼 우주 만물에 이익 주는 사람이 되라”
  
   

  근기설법으로 ‘중생의 갈길’ 열어 준 어른

  통도사 극락암 선원서 납자와 불자 ‘제접’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해 교학 연찬에 집중하던 스님은 “하루 종일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 푼 어치 이익도 없다(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는 〈화엄경〉 구절을 읽다가 참선을 수행법으로 삼았다. 스님은 1927년 11월20일 촛불이 춤추는 것을 보고 깨달음을 성취했다. 이때 스님은 게송을 노래했다.

“我是訪吾物物頭(아시방오물물두) 目前卽見主人樓(목전즉견주인루) 呵呵逢着無疑惑(가가봉착무의혹) 優鉢花光法界流(우발화광법계류)” 우리말로 옮기면 이렇다.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눈 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 / 허허 이제 만나 의혹 없으니 우담발화 빛이 온 누리에 흐르는구나.” 이후 스님은 옛 스님들의 법문을 옮기지 않고, 당신의 안목으로 바라보고 풀이한 불법의 진수를 전했다. 활구법문(活句法門)으로 중생들의 앞길을 열어준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불교 중흥과 조선독립의 희망을 놓지 않고 정진한 만해(卍海,1879~1944)스님과 경봉스님은 세수가 비록 10여년 차이 났지만, 각별한 사이였다. 만해스님이 1913년부터 8개월간 통도사에 머물며 <화엄경>을 강의할 때 인연을 맺었다. 두 어른이 주고받은 서신이 지금도 전해온다. 1933년 심우장이 세워질 무렵 오고간 간찰이다.

<사진> 선교를 겸비하고 자비심으로 중생을 인도한 경봉스님.

만해스님이 경봉스님에게 보낸 편지는 이렇다.

“毛角曾未生(모각증미생) 何有得與喪(하유득여상) 牧夫還多事(목부환다사) 漫築尋牛莊(만축심우장)” “털과 뿔이 나지도 않았는데, 어찌 얻고 잃음이 있겠소, 목부가 일이 많아, 부질없이 심우장을 지었네.” 경봉스님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牧夫多役事(목부다역사) 司賞一杯茶(사상일배다) (적)” “목부가 일이 많다 하니, 차 한 잔 드시구려, 저것을”

○…지금은 세속에서도 흔히 쓰는 해우소(解憂所)라는 말이 있다. 화장실을 나타내는 말인데, 경봉스님이 이름 붙인 것이다. 스님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 통도사 극락암의 화장실(그때는 변소라고 했다.) 이름을 새롭게 지었다. 소변을 보는 곳은 휴급소(休急所), 대변을 보는 곳은 해우소라고 했다. 극락선원을 찾은 수좌와 신도들이 이 표현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러자 어느 날 스님은 법문을 통해 뜻을 설명했다. “세상에서 가장 급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찾는 일이야. 그런데 중생들은 급한 일은 잊어버리고 바쁘지 않은 것은 바쁘다고 해. 휴급소라고 이름한 것은 쓸데없이 바쁜 마음 쉬어가라는 뜻이야. 그리고 해우소라고 한 것은 쓸데없는 것이 뱃속에 있으면 답답하고 근심 걱정이 생기는데, 그것을 다 버리라는 거야. 휴급소에 가서 급한 마음 쉬어가고 해우소에서 걱정을 버리면 그것이 바로 도(道)를 닦는 거야.”

○…대형가수 조용필의 4집 앨범 타이틀은 ‘못찾겠다 꾀꼬리’이다. 이 노래는 1980년대 초반 대마초 사건으로 방황하던 조용필이 경봉스님을 친견한 것이 계기가 되어 탄생했다. 경봉스님과 조용필의 대화는 이랬다. “뭐하는 놈인고?” “가수입니다.” “그러면 네가 꾀꼬리구나. 무슨 말인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그걸 찾아보이라.” 이렇게 해서 ‘못찾겠다 꾀꼬리’라는 노래가 세상에 나왔다. 가사 일부를 감상해보자. “못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 나는야 오늘도 술래 / 못찾겠다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꾀꼬리 / 나는야 언제나 술래 / 어두워져 가는 골목에 서면 / 어린 시절 술래잡기 생각이 날꺼야…”


<사진> 1970년대 극락선원에서 정진하던 수좌들과 함께 한 경봉스님. 앞줄 왼쪽부터 원담스님, 경봉스님, 좌우로 원산스님과 명정스님이 서 있다.

○…경봉스님은 통도사 극락암 약수터 표지석에 ‘물법문’을 새겼다. 물에 대한 고마움과 세상살이의 지혜를 알려준 것이다. “사람과 만물을 살려주는 것은 물이다 / 갈 길을 찾아 쉬지 않고 나아가는 것은 물이다 / 어려운 굽이를 만날수록 더욱 힘을 내는 것은 물이다 / 맑고 깨끗하며 모든 더러운 것을 씻어 주는 물이다 / 넓고 깊은 바다를 이루어 많은 고기와 식물을 살리고 되돌아가는 이슬비 / 사람도 이 물과 같이 우주 만물에 이익을 주어야 한다.”

○…“극락 오는 길이 없는데 우에 왔노” 극락암을 찾아온 신도들에게 스님은 먼저 이같은 말을 건넸다. 신도들의 답은 가지각색이었다. “차 타고 왔습니다” “걸어 왔습니다.” “길이 좋던데요.” 그러면 스님은 아무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도들이 돌아갈 때면 절마당까지 나와 전송했다. 집으로 가는 신도들에게 이런 당부를 잊지 않았다. “금강문 밖에는 돌부리도 많고 물구덩이도 많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말고 진창에 빠져 발 버리지도 말고 살펴가.” 인생을 살다보면 이런 저런 일이 닥치는데, 발밑을 잘 살피면서 살라는 가르침이었다.

○…경봉스님은 젊은 시절 잠을 쫓겠다며 머리를 기둥에 들이박기도 하고 얼음을 입안에 머금고 정진하기도 했다. 얼음 때문에 치아가 빠지질 정도로 생사를 걸고 수행했다. 치열한 정진을 거친 스님은 불법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누구든 찾아오는 사람은 문을 활짝 열고 반갑게 맞이했다. 빈부귀천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부처님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한 존재’이며, 스스로 불성(佛性)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그들에게 이런 법문을 자주 들려 주었다.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사바세상을 사는 것은 연극이나 마찬가지야. 기왕 연극을 하는 것이니 물질과 인간, 명예의 노예가 돼서는 안되니, 머리 쓰지 말고 한바탕 잘 놀아라.” 인상 깊은 또 다른 법문이다. “남의 집에 가면 우선 주인을 찾아야 무례를 범하지 않는다. 평생 이 몸을 끌고 다니는데 ‘주인공’을 찾지 않아서야 될 일인가. 주인공을 찾아야 이 몸에 무례를 범하지 않는 것이니, 지금 바로 나의 주인공을 찾는다면 만사형통일 것이다.”

○…스님은 방안에 안수정등(岸樹井藤) 그림을 걸어 놓고 있었다. 중생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쉽게 받아들이도록 한 그림이다. 외출을 할 때면 이 그림을 떼어 들고 다녔다. 그러다가 마을에 장이 서거나, 들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잠시 짬을 내어 쉴 때면 그림을 펴놓고 불법(佛法)을 설명해 주었다. 흥미 있는 스님 이야기에 누구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귀를 세우고 경청했다고 한다. 불법을 저자거리에서 편 스님은 수행자이면서 동시에 전법사(傳法師)였다. 더구나 키가 1m80cm가 넘었던 스님은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두루 갖추고 있어, 청중들이 이야기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경봉스님 법문 가운데 하나를 소개한다. “첫째. 신심(信心) 세 냥쭝, 둘째. 무언무설 (無言無設) 한 냥쭝, 셋째 만사무집착 (萬事無執着) 한 냥쭝, 넷째. 안한무사 (安閑無事) 한 냥쭝, 다섯째. 담연부동 (湛然不動) 한 냥쭝, 여섯째. 감인 (堪忍) 다섯 냥쭝.” 스님은 특히 ‘감인’에 대해 이렇게 강조했다. “아주 중요 해, 약무인행(若無忍行)이면 만사불성(萬事不成)이라 했어. 참기 어려운 것도 참을 줄 알아야 해” 감내하고 인내하는 것이 수행에 있어 중요하다는 가르침이다.

 

행장 /

‘장좌불와’선풍 진작

불교자료 다수 남겨

경봉스님은 1892년 4월9일 경남 밀양시 부내면 계수동(서부리)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김용국(金鏞國). 1898년 3월 밀양읍내에 있는 한문사숙(漢文私塾)에서 한학자 강달수(姜達壽) 선생에게 사서삼경 등을 배웠다. 16세 되던 해 모친상을 겪고 생사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907년 6월9일 양산 통도사에서 성해(聖海)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08년 3월 양산 하북면에 있는 명신학교(明新學校)에 입학해 1911년 3월 졸업했다. 1908년 9월 통도사에서 청호(淸湖)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12년 4월8일 해담(海曇)스님에게 비구계를 수지했다.

<사진> 경봉스님이 주석하던 극락선원 삼소굴.

1916년 9월 각 지방을 순회하는 포교사가 되어 불법(佛法)을 전했다. 1925년 3월 양산 통도사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 회장에 추대 돼 30여 년간 소임을 보았다. 1930년 2월 양산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원장(지금의 강주)을 맡아 후학을 양성했으며, 1935년 9월에는 통도사 주지로 취임했다. 1941년 3월에는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선리참구원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1949년 4월 통도사 주지로 다시 취임한 스님은 1953년11월3일부터 원적에 들 때까지 통도사 극락암 호국선원 조실로 대중을 제접했다.

스님은 1982년 7월17일 “야반삼경(夜半三更)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조용히 원적에 들었다. 세수 91세, 법랍 75세.

통도사=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불교신문 2460호/ 9월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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