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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27. 수월음관

 

27. 수월음관

외세가 밀물처럼 조선을 침략하던 19세기말. 백성들은 집 잃은 나그네처럼 처참한 생활로 연명했다. 이때 출현한 경허스님은 ‘조선의 등불’로 암울한 시대를 밝히며 수행의 길을 열었다. 경허스님 문하에는 수월.혜월.만공.한암 스님 등 걸출한 선지식들이 배출되어 법을 계승하고 불교의 생명을 이었다. 수월(水月, 1885~1928)스님의 행장을 일제강점기 <불교>를 비롯한 각종 자료와 증언으로 살펴보았다.

 

“도를 닦는 다는 것은 마음을 모으는 거여”

  경허스님 제자로 북장에서 가르침 전파

  일심으로 천수주력 삼매일여 경지 도달

                

<사진설명>수월스님 진영. 여수 흥극사와 중국 수월정사 등에 봉안돼 있다.

○…설정스님(덕숭총림 수좌)이 혜암스님과 벽초스님에게 들은 이야기 가운데 수월스님의 출생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자식이 없어 노심초사하던 수월스님의 부친이 어느 날 나무하러 산에 갔다가 포수에게 쫓기는 노루를 ‘솔굴’에 숨겨주었다. 뒤늦게 달려온 포수가 노루를 찾기에 엉뚱한 방향을 알려주어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이듬해 봄에 또 다시 산에 갔더니, 노루가 나타나 옷깃을 물어 잔설(殘雪) 있는 곳으로 인도했다. 노루를 따라가 보니 눈이 쌓여 있었는데, 유독 한곳만 녹아 있었다. 노루는 그곳을 발로 팠으며, 수월스님 부친은 그곳에 선조들의 묘를 썼다고 한다. 그 후 건강한 아이를 갖게 됐는데, 훗날 수월스님이었다.”

○…수월스님은 어려서 이집 저집을 전전하며 머슴살이를 했다. 나무를 하다 팔아 생활을 영위하던 수월스님은 장에 갈 때마다 한 스님이 눈에 들어왔다. 키가 장대한 스님의 모습이 너무 좋아 보여 그 스님을 따라 갔는데, 그곳이 서산 천장암이었다. 당시 천장암 주지는 경허스님의 속가 형님인 태허스님이었다. 출가사문의 길에 들어선 수월스님은 매일 나무를 하고 짚신을 삼고 방아를 찧으며 정진했다.

○…천장암 아래 마을은 장요리(長要里)이다. 수월스님이 천장암에 머물 무렵 마을사람들은 몇 번이나 천장암으로 달려 왔다고 한다. 천장암에서 비추는 서광(瑞光)이 마치 산불이라도 난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불을 끄려고 달려와 보면 천장암은 아무 이상이 없고, 방광(放光)한 수월스님의 모습만 보았을 뿐이다.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수월스님의 수행력과 도력, 그리고 주민들에게 존경 받았던 상황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몇 차례 그런 일이 있은 후로 천장암이 환하게 밝아지는 일이 생겨도 사람들은 달려가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 오늘도 수월스님이 방광하시는 구먼.”

○…어느 때인가 수덕사 정혜선원에서 수월스님이 며칠이나 보이지 않았다. 대중이 모두 나서 찾았지만 행방이 묘연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해우소에 가보니, 한쪽 구석에 수월스님이 있었다. 대중이 문을 열어도 몰랐다. 더구나 뒤를 닦는 자세로 구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님 도대체 뭘 하고 계십니까.” 그제야 허리를 펴고 일어선 스님이 말했다. “그 놈의 쥐가 똥을 맛있게 먹고 있어서 구경했지.” 대중들은 황당하면서도 어떤 경지에 들어야 3일이나 그렇게 있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수월스님 문하에서 정진했던 성암스님이 성수스님에게 들려준 일화이다.

○…산에서 나무를 한 짐 해온 뒤 공양간에서 불을 지폈다. 무쇠 솥을 걸어놓고 아궁이에 나무를 넣기 시작했다. 시뻘건 불이 금세 아궁이 속으로 들어갔고 무쇠 솥의 물은 끓기 시작했다. 수월스님은 또 다시 삼매에 들었다. 곁에 놓아둔 나무를 하나하나 아궁이에 넣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무는 모두 타고 솥안에 있던 물도 모두 증발해 버렸다. 무쇠 솥도 벌겋게 닳아 올랐다. 그러나 수월스님은 삼매일여 경지에서 나오지 않았다. 다른 스님이 발견하지 못했으면 밤을 샜을지도 모를 일이다.

 

 

○…스님이 출가한 천장암에는 방앗간이 있었다.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방아를 돌려 곡식을 찧어 식량으로 삼았다. 그날도 방앗간에서 같은 일을 했다. 방아 공이가 올라가면 바닥에 움푹 패인 구멍으로 곡식을 넣었다. 그리고 다시 공이가 올라가면 알갱이를 뒤집거나, 껍질이 다 벗겨지면 꺼낸 후 다른 알갱이를 넣었다. 그 같은 일을 반복하던 스님이 삼매에 들었다. 공이가 올라가 곡식을 넣는 순간, 바닥의 구멍 안에 들어있는 알갱이들을 바라보면서 삼매에 든 것이다. 잠시 후면 공이가 바닥을 향해 떨어질 텐데……. 마침 태허스님이 이 모습을 보고, 큰 소리로 말했다. “수월아 뭐하는 거냐” 그제야 삼매에서 깨어났다고 한다.

<사진설명>수월스님의 출가도량인 서산 천장암.

○…수월스님이 북방으로 간 것은 스승 경허스님과 좀 더 가까워지려 했던 것도 한 이유로 보인다. 수월스님은 금강산 건봉사와 영변 석왕사에 머문 후 함경도 갑산에 있던 은사를 찾아 짚신을 만들어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경허스님은 수월스님을 만나지 않았다. 방문을 사이에 둔 은사 경허스님과 제자 수월스님의 만남은 오로지 수행정진을 본분사로 삼은 선지식들의 ‘법거량’이었을 뿐이다. 훗날 경허스님의 입적소식을 혜월.만공스님에게 전한 수월스님은 더욱 북방으로 올라가 독립운동에 나선 조선인을 후원하면서 정진했다.

 ○…만주에 머물 당시 수월스님은 주먹밥을 만들고 짚신을 삼아 나눠주는 것을 수행의 한 방편으로 삼았다. 나라를 잃은 채 험한 만주벌판을 유랑하던 조선인에게 당장 급한 것은 한 끼의 식량이고, 한 켤레의 짚신임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월스님이 탁발을 하려고 마을에 들어서면 아무리 사나운 개도 짖지 않았다고 한다. 산길을 걸으면 노루와 사슴, 토끼 등 동물들이 거리낌 없이 스님 곁으로 다가 왔다. 동행하던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여 “어떻게 하면 짐승들이 도망가지 않습니까”라고 물으면, 수월스님의 답은 간단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뉴, 악의(惡意)만 없으면 되는 것이여.” 만공스님은 생전에 “복덕과 도력을 누가 감히 감당하겠냐”면서 수월스님을 높이 기렸다고 한다.

○…수월스님이 간도에 머물 때 금오스님과 청담스님 등 남방의 수좌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구했다. 금오스님이 공부할 때의 일이다. 마을 주민 한명이 ‘아기 돼지’를 갖고 와서 불공을 드려달라고 청했다. 부처님 전에 돼지를 올리겠다는 요청에 난감해진 금오스님이 수월스님에게 그 같은 소식을 전했다. “어찌할까요.” 수월스님은 아무 표정 변화도 없이 “부처님 앞 탁자에 올려라”고 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꽥 꽥”하고 울던 돼지는 부처님 탁자에 올라가더니, 얌전하게 있는 것이 아닌가. 수월스님은 직접 목탁을 들고 불공을 드렸다. 정성스럽게 축원하던 스님은 “돼지도 잘 크게 해주세요”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새끼 돼지가 무사히 마을로 돌아가 잘 성장했음은 물론이다.

 ○… 수월스님의 법문은 전해오는게 거의 없다. 다음은 구전을 통해 전하는 스님의 법문 가운데 일부이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거 아녀. 이리 모으나 저리 모으나 무얼 허든지 마음만 모으면 되는 겨. … 도를 깨치지 못하면 두 집에 죄를 짓게 되는 겨. 집에 있으면서 부모님을 열심히 모시면 효도라도 하는데, 집을 나와서 도를 깨치지 못하면 두 집에 죄를 짓는 게 아니고 뭐여. … 사람 몸 받아 참 나를 알지 못하고 참 나를 깨치지 못하면 이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어. 이보다 더 큰 한(恨)이 어딨어.”

○…입적할 시기가 도래했음을 알게 된 스님은 당신 스스로 준비한 장작더미에 올라 불을 놓았다고 한다. 짚신 하나 머리에 이고, 불 속으로 들어간 자화장(自火葬)이었다. 연기는 향으로 변하여 널리 퍼졌고, 일주일간이나 향훈(香薰)이 계속됐다고 한다. 또한 일주일간 방광이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수월스님의 입적에는 이설(異說)도 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불법을 실천했던 수월스님의 삶은 ‘지금의 한국불교’에도 유효한 하나의 경책이다.

 

행장 /

수월스님은 충남 홍성 출신으로 알려졌다. 1885년 태어난 스님은 속성 조차 정확하지 않다. 전(田)씨라고 알려졌지만, 일부에서는 전(全)씨, 김(金)씨, 제(祭)씨, 최(崔)씨라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어릴적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스님은 고아가 되어 머슴살이를 하며 연명했다. 천성이 착하고 성실한 스님은 부지런하게 일하여 주위의 신망을 얻었다. 그러나 머슴살이로 인해 20세 될 때까지 전혀 글을 배우지 못했다.

서산 천장암으로 출가한 스님은 처음에는 공양주와 나무하는 일을 했다.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소임에 전념했던 스님은 천수대비주를 알게 된 후 일념으로 염송했다. 행주좌와 어느 순간에도 천수 주력을 놓지 않은 스님은 구경(究竟)에 이르렀지만, 당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수행에만 몰두했다.

공양주 나무꾼 ‘수행’

묵언스님에 법맥 계승

경허스님의 인가를 받은 수월스님은 금강산과 묘향산 등에 몸을 숨긴 채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묵묵히 실천했다. 경허스님 열반후 더욱 북방으로 올라간 수월스님은 60세가 되어가는 노구에도 한 농가의 일꾼으로 들어가 지냈다. 품삯으로 주먹밥을 만들고 짚신을 삼아 ‘무주상 보시’를 실천했다.

말년에 만주 송림산 아래에 화엄사라는 ‘작은 절’을 짓고 밭을 일구며 지냈다. 화엄사에서 지내길 8년. 스님은 점심공양을 마친 후 목욕재계하고 새 옷과 새짚신을 머리에 얹은 채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호랑이와 새, 산천초목이 모두 울었다고 한다. 이때가 1928년이다. 수월스님의 법은 묵언스님을 거쳐 도천.명선스님 등으로 이어졌다.

서산=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불교신문 2454호/ 8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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