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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26. 금오태전

 

26. 금오태전

혜월스님 상좌 도암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금오태전(金烏太田, 1896~1968)스님은 만공스님 법제자 보월스님의 법맥을 이어 정진했다. 혜월스님과 만공스님은 경허스님 제자로 한국불교 중흥조이다. 전국 주요 선원에서 조실로 후학을 인도했던 금오스님은 해방 후 정법수호를 위해 정화불사를 추진했다. 금오스님의 수행을 원로의원 월서스님(금오사상연구소 이사장)과 혜광스님(수원 팔달사 주지)의 증언, 그리고 <금오집>을 참고로 조명했다.

          

 

“자기 보물 알고 쓰면 苦中에도 樂이 있다”

 

 경허-만공-보월스님 법맥 이은 선지식

 결제 해제 따로 없이 화두참구 수행정진

 

○…“참선은 나를 찾는 것이야. 나를 모르면서 책만 많이 보는 것은 소용없어.”

금오스님은 수행방법 가운데 참선이 가장 중요한 공부임을 강조했다. 참선공부를 소홀히 하는 제자에게는 “나를 알려고 중노릇을 하는데 참선하지 않으면 중이 아니야”라며 따끔하게 경책했다. 김천 직지사 선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용맹정진 기간에 수마(睡魔)로 인해 졸음을 참지 못한 제자를 본 금오스님은 잠시 뒤 지대방으로 오도록 했다. 지대방에 들어선 순간 “네, 이놈 내생에 짐승이 되려고 수마에게 지느냐. 그러려면 차라리 목숨을 버려라”며 혼비백산한 정도로 야단을 쳤다. 혼쭐이 난 제자는 은사의 가르침을 깊이 받아들여 용맹정진을 잘 마쳤다고 한다.

<사진설명>금오스님 진영. 진영의 ‘찬’은 경봉스님이 썼다. 제공=월성스님

○…금오스님은 울력(雲力)에 있어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누구나 울력에 동참해야 했으며, 스님 먼저 앞장섰다. 제자들과 만행할 때 다 기울어져가는 절이 있으면, 며칠이고 수리를 다 했다. 그렇다고 보시금을 따로 받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스님을 시봉하는 제자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무심무욕(無心無慾)으로 모든 일을 처리했던 금오스님의 가르침은 제자들에게 지금도 큰 교훈으로 남아있으며, 한국불교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사리판단이 정확했던 금오스님의 성품은 불(火) 같았다. 조금이라도 잘못된 일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잡도록 했다. 웬만한 마음가짐을 갖지 않으면 스님 앞에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고 많은 수좌들은 기억한다. 그러나 금오스님의 자비심(慈悲心)은 바다처럼 넓었다. 스님이 생전에 “넓게 받아 드리는 포용력은 마치 자부(慈父)의 너그러움이 큰 바다와 같은 것처럼 그와 함께 하여야 한다”면서 “자비의 마음은 배나 다리가 되어 뭇중생을 고통의 세계에서 안온한 열반의 언덕으로 건너게 하는 넓은 선행(善行)과 공덕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오스님은 하심(下心)을 수행의 도반으로 여기고 거지들의 무리에 들어갔다. 당시 스님은 세 가지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첫째는 어느 밥이든 가리지 않고 먹는다. 둘째는 옷이 떨어져 살이 나와도 탓하지 않는다. 셋째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잠을 잔다.

훗날 스님은 “인간생활의 세 가지 기본요소인 의식주에 얽매이지 않고 수행한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조건과 환경을 탓하지 않고 하심을 근간으로 정진했다.

<사진설명>금오스님의 친필.

 

 ○…금오스님이 선지식을 찾아 법을 구하기 위해 만행에 나섰을 때의 일이다. 수월(水月)스님을 친견하려고 만주로 향하는 길 이었다. 회령을 지나 러시아 땅에 들어선 스님은 검문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마적 떼의 강도 살인사건이 발행한 직후였다.

피해자의 거짓 증언에 감옥에 갇혀 자백을 강요받았다. 며칠 후 진범이 잡혔지만 풀어줄 기미가 없었다. 감옥에 같이 있던 한 조선인이 “공연한 말썽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러시아인들이 감옥에서 죽도록 내버려둘 것 이며, 피해자도 보복이 두려워 풀어 주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라고 했다.

금오스님은 “억울하게 감옥에서 죽을 수는 없다.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 이곳서 벗어나는 도리 밖에 없겠다”면서 가부좌를 하고 관세음보살을 염송하기 시작했다. 사흘째 되는 날 밤. 생면부지의 사람이 나타나 감방의 쇠창살을 뽑고 미소를 짓는 꿈을 꾸었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스님이 쇠창살을 뽑으니 꿈처럼 됐다. 그렇게 무사히 감방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때마침 문지기들도 졸고 있었다.

○…정화불사에 앞장섰던 스님은 1964년 7월 대한불교(지금의 불교신문)에 ‘한국불교 정화의 바른 안목’이란 글을 통해 수행가풍을 다시 살리고 정법을 펴기 위한 노력을 당부했다.

 “승려라 함은 세상만사를 헌신짝 같이 던져버리고 수도(修道)로써 그 목적을 삼을 뿐이오, 그 외의 어떤 것도 출가자의 바라는 바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주지를 사는 것으로 장기(長技)를 삼는 주지승(住持僧)이 있는가 하면, 사무승(事務僧)이 있고, 무사방일승(無事放逸僧)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승명(僧名)이 있다. 물론 종단을 움직이고 우리의 정화불사를 체계 있고 원만하게 회향하려면 사무승도, 주지승도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스님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승려된 본지풍광(本地風光)을 잃어서야 그 주지의 직무와 사무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산 보덕사에서 공부하던 금오스님은 보월스님에게 공부의 경계를 점검 받고 법제자가 됐다. 당시 금오스님은 “透出十方界(투출시방계) 無無無亦無(무무무역무) 個個只此爾(개개지차이) 覓本亦無無(멱본역무무)”라고 했다.

“시방세계를 투철하고 나니, 없고 없어서 없는 것 또한 없다. 하나하나 모두 그러하기에 뿌리를 찾아봐도 또한 없고 없을 뿐이다.” 게송을 들은 보월스님은 금오스님의 ‘법 그릇’을 간파하고 법제자로 인정했다.

<사진설명>젊은 시절 운수납자로 지내던 때의 금오스님. 출처=금오집

그러나 보월스님이 갑자기 입적하는 바람에 금오스님은 건당(建幢, 스승에게 법맥을 이어받는 일) 의식을 갖지 못했다.

수제자의 입적과 손(孫)법제자가 건당 의식을 갖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긴 만공스님은 보월스님을 대신하여 건당식을 치러주고, 게송도 전했다.

○…해제 철이면 스님은 운수행각(雲水行脚)에 나서는 것을 즐겼다. 행주좌와 어느 것이나 공부의 방편이었다. 스님은 조실로 지낼 때도 해제가 되면 젊은 수좌들과 만행(萬行)에 나섰다.

때문에 서울 올라가는 길목에 있던 수원 팔달사는 금오스님이 젊은 납자들과 자주 들렸던 곳이다. 금전에 별 관심이 없던 금오스님은 수좌들과 무작정 기차를 타고 수원역에서 내린 적이 여러 번이다. 그러면 팔달사에 있는 범행스님 등 상좌들이 은사스님을 모셨으며, 한동안 팔달사는 눈 푸른 납자들로 북적 거렸다. 평생 검소하게 살았던 스님은 만행을 할 때 필수품이 ‘가사, 발우, 법의(장삼)’와 천만(天幕) 이었다고 한다. 해를 가리고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천막을 지니고 다녔던 것이다.

○…이번 취재과정에서 금오스님이 한 스님에게 전한 글이 발견됐다. 이 글에서 스님은 “자기보물을 알고 써야 한다”면서 수행정진을 강조했다. 다음은 금오스님의 친필 글 전문이다. “자기 寶物(보물) 알고 쓰면 苦中(고중)에도 樂(낙)이 있고, 자기 보물 모르오면 苦樂(고락)이 一揆(일규)니라. 이럼으로 衆生諸佛(중생제불) 一理齊平(일이제평)하다하니 理平(이평)은 올커니와 고락은 不平(불평)하니 이게 무삼 도리던고 有智丈夫(유지장부) 살피소서.

행장

1896년7월23일 전남 강진군 병영면 박동리에서 부친 정용보(鄭用甫) 선생과 모친 조씨(趙氏)의 2남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6세(1911년)에 금강산 마하연 선원에서 도암긍현(道庵亘玄)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법호는 금오(金烏)이고, 법명은 태전(太田)이다.

도암스님은 경허스님 제자인 혜월(慧月)스님의 법을 이었다. 마하연에서 도암스님에게 계를 받은 스님은 1922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수선안거후 제방선원에서 정진했다. 1922년 8월20일 부산 범어사에서 일봉(一峰)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이어 만주에서 수월(水月)스님 문하에서 공부 했으며, 예산 보덕사에서 보월(寶月)스님 회상에서 정진했다. 보월스님이 일찍 세상을 떠난 후 만공(滿空)스님에게 보월스님의 사법(嗣法, 스승에게 법을 이어받은 제자)임을 증명 받았다.

이후 스님은 김천 직지사를 비롯해 안변 석왕사, 도봉산 망월사, 서울 선학원, 태백산 각화사, 지리산 칠불선원, 김제 금산사, 팔공산 동화사, 청계산 청계사 등 제방선원에서 조실(祖室)로 후학들을 인도했다.

1954년 전국 비구승대회 추진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정화불사의 선봉이 됐다. 이듬해(1955년)에는 조계종 부종정과 감찰원장 소임을 맡았다. 1958년에는 총무원장으로 선출됐으며, 1961년에는 크메르(캄보디아)에서 열린 제2차 세계불교도대회에 한국수석대표로 참석했다. 보은 법주사 조실로 대중을 제접하던 스님은 1968년 10월8일 오후7시 원적에 들었다. 세수 73세, 법납 57세. 제자로는 월산.범행.월남.탄성.이두.혜정.월성.월주.월서.월만.월탄 스님 등 49명에 이른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불교신문 2452호/ 8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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