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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23. 고암상언

 

23. 고암상언

종정을 3차례 역임한 고암상언(古庵祥彦,1899~1988)스님은 자비와 인욕으로 대중을 맞이하며 수행자의 위의를 잃지 않고 정진한 우리 시대의 선지식이다. 계.정.혜 삼학을 두루 갖추고 중생을 인도했다. 스님의 삶을 전법제자 대원스님(공주 오등선원 조실)의 회고와 비문을 비롯한 관련 문헌을 참고하여 재구성했다.

            

                 

“삼천대천 세계에 佛恩 나퉈 자비광명 영원하라”

                     

   계정혜 구비 종정 3차례 역임…자비와 인욕으로 대중을 섭수         

                                             

<사진> 부산 범어사에 촬영한 고암스님 모습. 자애로운 표정과 활짝 핀 꽃이 조화를 이뤘다.  출처=공주 오등선원 조실 대원스님

○…나주 다보사에 주석할 무렵. 마침 보살계 법회를 하루 앞두고 신도들이 절에서 잠을 잤다. 그때 한 할머니가 밤중에 일어나 요강에다 볼일을 보았다. 예전에는 잠자리에 요강을 두는 일이 예사였다.

문제는 다음날 이었다. 아침 공양을 지으려고 나온 공양주는 깜짝 놀랐다. 누가 부처님 마지 그릇에 실례를 해 놓은 것이 아닌가. 절은 발칵 뒤집혔고, 할머니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공양주는 부리나케 고암스님에게 달려갔다.

“시님, 큰일 났당게요.” 전후사정을 설명했다. 스님은 화를 내기는 커녕 이렇게 말했다. “하하. 그렇잖아도 마지 그릇을 바꿀 요량이었는데, 그 보살님 덕분에 바꾸게 되었으니 참으로 잘된 일입니다.” 꾸중들을 생각에 마음이 조마조마했던 ‘시골 할머니’는 스님의 말을 전해 듣고 “자비로 보살펴 주어 고맙습니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종정은 종통을 계승하는 최고의 권위와 지위를 갖는다. 고암스님은 세 차례나 종정을 지냈지만 당신을 앞세우거나 내세우지 않았다. 권위는 ‘억지’나 ‘강요’에서 나오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종정이 된 후 어느 지방에 내려갔을 때의 일이다.

스님보다 세수와 법납이 많은 모스님을 만났는데, 인사를 드려도 앉아서 받는 것이었다. 종단의 최고 어른인 종정의 인사를 그렇게 받으니 예의에 맞지 않는 일이다. 마음이 언짢을 수 도 있지만, 그렇다고 스님은 화를 내지 않았다. 다만 다음날 다시 찾아가 또 인사를 드렸고, 며칠 뒤 서울로 올라갈 때 또 다시 들려 “스님, 인사드리고 올라가겠습니다”라며 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 스님은 “종정스님이 왜 자꾸 오시냐”며 당혹스러워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또 다시 내려와 절을 하며 인사를 하자, 그때서야 모스님이 “종정스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바쁘실 텐데…”라며 맞절을 했다고 한다.

○…고암스님이 만공스님 회상에서 정진할 때다. 당시 대중들이 100일 용맹정진의 원력을 세우고 공부했다. 사실 용맹정진은 화두를 참구하는 일 못지않게, ‘스스로의 체력’을 시험하는 아주 엄중한 수행이다. 따라서 남을 돌아볼 틈이 없다. 하지만 고암스님은 용맹정진하면서 공양주 소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대중을 시봉하는 일을 병행하는 일이 어찌 쉬웠겠는가. 그래도 틈을 내어 몰래 다른 스님들의 짚신을 고쳐주거나 새로 만들어 선방 댓돌 위에 올려놓았다.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은 일이었으니, 대중들이 한참동안 누가 그랬는지 몰랐다. 또한 스님은 만공스님의 고무신도 매일 깨끗하게 닦아 놓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이같은 숨은 보살행은 ‘지금의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

○…1960년대 말, 고암스님이 보낸 편지와 5만원이 부산 범어사에 도착했다. 다들 무슨 일인지 의아했다.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내가 과거에 선방에서 공부할 때 무일푼으로 용맹정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실신하여 넘어졌을 때 대중들이 나를 치료해준다고 주머니를 털어 목숨을 부지하게 했습니다. 이제야 대중에게 갚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번에 보내는 것은 지금의 대중스님들이 잘 써주시기 바랍니다.”

○…1950~60년대 정화불사가 한창일 때 비구 대처의 갈등이 깊었다. 반목이 대단했다. 하지만 고암스님 등 몇 스님은 예외였다. 비구 대처 어디서나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그만큼 계행이 청정하고 자비와 덕을 갖춘 ‘훌륭한 인품’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다른 곳에 비해 정화가 늦었던 호남지역에 스님이 방문하면, 그 소식을 들은 스님들이 앞 다투어 법문을 청했다고 한다.

<사진> 고암스님(왼쪽)과 제자 대원스님.

○…종정으로 있을 무렵 지방의 한 큰절을 찾았다. 종정스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한 스님이 인사를 하고 ‘공격적인 질문’을 던졌다.

“종정스님. 요즘 종단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잘못되고 있는데, 종단이 이래서야 되겠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고암스님은 답을 했다. “종단이 이렇게 된 것은 (종정인) 내가 잘못이 많은데, 오늘 (좋은) 사람을 만났으니, 스님이 나와 같이 올라가 종단을 바르게 합시다.” 잘못을 지적했던 스님은 순간 멍해졌다. 서울에 같이 가자니 난감했다. 고암스님의 말이 계속됐다.

“오늘 내가 법문을 마치거든 같이 올라갑시다. 스님 같은 인물이 초야에 묻혀 지내야 되겠는가” 질문한 스님은 더욱 난감해졌다. 고암스님이 말을 이었다. “가야되네, 여기서 정진하는 것 보다, 서울에 올라가는 게 더욱 급해. 그래 (서울에 가는 것을) 결정했는가. 고암스님의 말을 거듭 듣고 난 그 스님은 “종정스님, 제가 괜히 헛된 말을 해서 대단히 잘못했습니다”라며 서둘러 방에서 나왔다고 한다.

○…어느해 동짓달 스님이 주석하던 해인사 용탑선원. 그날은 공양주가 팥죽을 쑤었다. 그런데 시간 조절을 잘못하여 팥죽이 반은 타버리고 말았다. 공양시간은 다가오고 공양주 보살은 어쩔 줄 몰랐다. 대중들도 ‘저걸 어찌 먹나’라며 안절부절 못했다. 마침 고암스님이 내려와 ‘타버린 팥죽’을 보았다. 스님은 “보살님, 팥죽 잘 했소. 다음에도 이렇게 잘 해주시오”라며 당신 먼저 한 그릇을 모두 드셨다. 고암스님이 아무 불평 없이 ‘타버린 팥죽’을 드시니, 다른 대중이 공양주 보살을 탓하지 못했으며, 모두 남김없이 공양을 마쳤다.

○…고암스님은 1938년 5월 용성스님에게 법을 이었다. 당시 용성스님은 “선재(善哉)라 만고풍월(萬古風月)이로다”라며 게송을 전했다. “萬古風月(만고풍월) 知音者唯(지음자유) 古庵獨對(고암독대) 風月萬古(풍월만고) 佛祖元不會(불조원불회) 掉頭吾不知(도두오부지) 雲門胡餠團(운문호병단) 鎭州蘿蔔長(진주라복장)” “만고에 풍월을 듣는이 누구런가. 고암을 홀로 대하니 풍월이 만고로다. 부처와 조사도 원래 알지 못하고 머리를 흔들며 나도 또한 알지 못하며, 운문의 호떡은 진주의 무는 길기도 하네.” 

 

고암스님의 발원문 /

고암스님이 1980년 3월에 직접 작성한 발원문은 원력이 담겨있다. 일부 내용을 옮겼다.

“…거룩하신 위신력과 신통력으로 법계의 유연 무연 중생을 도탈(度脫)하사…이 땅에 불국토를 장엄하는 세존의 능화(能化)를 베푸시며 자유와 평화 자비와 희사의 불은(佛恩)을 삼천대천세계에 고루 나투사 자비의 광명이 영겁에 빛나는 영광을 이겨레에게 내리시며…모든 불자들이 선인선과에 따라 불종자를 심고 신심과 원력이 증진하며 삼보호지 불사에 흔연동참하고…세세생생에 부처님의 회상에 머물러 영겁에 퇴전이 없는 무량선림(無量禪林)과 교해(敎海)에 정진 정각토록 가피와 호념을 내리시기 삼가 분향 발원하나이다.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행장 /

제산스님 은사로 출가

용성스님 전법게 받아

스님은 1899년 10월5일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식현리 425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윤문(尹)선생, 모친은 하원행(河原幸)여사. 스님의 속명은 지호(志豪 또는 之壕). 어려서 한문을 익힌 스님은 적성 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합천 해인사에서 제산스님을 은사로 불문에 들었다. 이때가 1917년 세수 19세였다.

해인사 강원에서 공부하던 스님은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만세 비밀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해인사 불교강원을 졸업하고, 1922년 용성스님에게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했으며, 훗날 용성스님에게 전법게를 받았다.

스님은 1923년 7월 해인사에서 수선안거 한 이래 직지사 천불선원, 통도사 극락선원, 덕숭산 정혜선원, 도봉산 망월선원, 백양사 운문선원, 천성산 내원선원, 오대산 상원사선원 등에서 정진했다. 이때 제산.혜월.만공.용성 스님 회상에서 공부의 깊이를 더했으며, 유점사.표훈사.마하연.묘향산 등 북녘선원에서도 정진했다.

고암스님은 해인사.백련사.표훈사.직지사.범어사 선원의 조실, 그리고 나주 다보선원장, 해인사 용탑선원 조실로 대중을 제접했다. 스님은 1967년 7월 제3대 종정, 1972년 7월 제4대 종정, 1978년 5월 제6대 종정으로 취임하는 등 한국불교 최고의 어른으로 후학을 인도했다.

말년에는 미국.버마.태국.스리랑카.호주 등에서 국제보살계단을 여는 등 해외포교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스님은 1988년 10월25일(음력 9월15일) 오후8시 가야산 해인사 용탑선원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90세. 법랍 71세였다. 스님 문하에는 석경.운해.성준스님 등 90여명의 제자들이 있다.

공주=이성수 기자

 

[불교신문 2443호/ 7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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