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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39.지암종욱

 

39.지암종욱

일제강점기와 해방 등 격동의 세월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불법을 수호했던 지암종욱(智庵鍾郁, 1884~1968)스님. 선지식 한암스님을 시봉하며 교단을 지키고 대중을 외호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지암스님의 생애는 근세 한국불교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지암화상 평전>과 지암불교문화재단 초대 이사장 성담스님의 증언을 참고해 지암스님의 생애를 정리했다.  

  

 

“구도행을 하려면 계율이라는 사다리를 거쳐라”

 

 

○…지암스님은 후학들에게 “계율을 받아 지닌 그대로 지켜가며 수행했을 때 청정을 잃지 않는 법”이라면서 ‘계율호지(戒律護持)’를 강조했다. 다음은 지암스님이 계율의 중요성을 강조한 육성이다.

“계를 지키지 않는 자가 물들인 옷을 입었다 해서 승려라 하겠는가. 세인의 존경은 커녕 손가락질 받을 것이 불을 보듯 분명하다. 계를 지키지 않는 자가 제 아무리 좋은 말로 법을 받들며 설한다 해서 누가 그것을 믿겠는가. 계를 지키지 않는 자가 어떻게 신심인들 내겠는가. 자기 자신을 더럽히고 법을 속이는 것이며, 또 남에게 해를 입히는 결과가 된다. 불자는 마땅히 자비심을 내어 세간에 수순하며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구도행이 앞서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계율이라는 사다리를 거쳐야 한다.”

<사진설명>일제강점기 종무총장으로 조선불교 ‘수호’ 독립운동에 참여.월정사 재정확충 ‘노력’ 격동의 세월을 온몸으로 부딪히며 불법수호를 위해 노력한 지암 이종욱 스님의 80세 무렵 진영. 월정사 진영각에 모셔져 있다. 출처=‘지암화상평전’

○…지암스님은 1930년 석존정골탑묘찬앙회를 구성했다. 구심점을 잃은 조선인과 불자들의 마음을 모으는 한편 살림이 바닥난 월정사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적멸보궁 성지화의 원력을 세운 것이다. 석존정골탑묘찬앙회에는 당시 교정(敎正) 한암스님을 비롯해 용성스님과 만공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이 참여했으며, 박영효.김병로 등 민족지도자들도 동참했다. 모두 21조로 된 찬앙회 규약의 3조 내용은 이렇다. “본회는 불교도의 신앙을 집중하여 석가여래의 정골을 봉안하신 오대산 적멸보궁을 영원히 신앙.수호하여 인천(人天)의 복전이 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석존정골탑묘찬앙회를 구성할 당시 지암스님은 1923년 의열단원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3년간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고 나온 지 몇 해 되지 않았다. 출감후 스님은 빚더미에 올라선 월정사 재건의 선봉에 섰다. 본말사 승려대회에서 월정사 주지로 추대됐으나 총독부가 ‘사상’을 문제 삼자, ‘월정사 사채(寺債) 정리 총무위원’이란 소임을 맡아 토지와 재산 문제 등을 해결 했다.

 ○…노년에 접어든 지암스님은 주문진에 사찰 창건의 원력을 세웠다. 마지막 발원이었다. “물고기를 잡는 것을 업으로 삼는 어민들이 많은 주문진에 부처님 가르침을 펼 수 있는 법당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어민들이야말로 누구보다 먼저 부처님의 자비문으로 들어야 할 사람들이다. 어찌 지체할 수 있는가.” 한때 종무총장(지금의 총무원장에 해당)과 국회의원을 지냈지만, 노년의 지암스님이 사찰을 창건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셋방을 얻어 시작한 불사는 상좌들이 직접 흙벽돌을 찍어야 했고, 손수 팔을 걷고 일 해야 했다. 이때 스님의 세수 80을 넘겼고, 일제강점기 고문 후유증으로 오른쪽 다리가 불편했지만 원력을 멈추지 않았다. 절이 지금의 동명사(東明寺)이다.

○…지암스님은 하루 네 차례 <금강경> 독송을 했다. 오전 5시와 10시, 오후 4시와 8시가 되면 <금강경>을 읽으며 기도를 했다. 시간을 어기는 경우가 없었다. 당시 강릉에서 서울까지 버스로 8시간이 소요됐는데, 도중에 <금강경>을 독송할 때가 되면 어김없이 경전을 펴놓고 염송했다. 마을에 갔다가 독송할 시간이 되면, 아무 가게나 들어가서 “주인, 내 책 좀 읽고 갈게요”라며 독송했을 정도였다. 7년간 지암스님을 시봉했던 성담스님은 “매일 노스님의 염송을 듣다보니, 저절로 <금강경>을 외우게 되었다”고 했다.

○…성담스님이 지암스님을 모시고 다닐 때, 상여를 만나거나 초상집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상여를 보면 그 자리에 멈춰 나직한 목소리로 ‘나무아미타불’을 반복했다. 상여가 동구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염송은 계속됐다. 또 초상집이 있으면, 그 집 대문 앞에서 역시 ‘나무아미타불’을 조용하게 염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담스님과 지암스님의 대화이다. “노스님, 아시는 분이십니까.” “아니, 난 몰라, 너는 아냐.” 직접 인연이 있거나 없거나 평등한 마음을 내어 망자(亡者)의 극락왕생을 발원했던 것이다.

<사진설명>지암스님(앞줄 가운데)과 제자 천운스님(앞줄 오른쪽).

○…“백범 선생이시여. 해방되던 그 이듬해 정월 2일에 이시영 선생과 소납을 자동차에 태워 가지고 진관사에 가서…” 지암스님이 1946년 1월 2일 백범 김구선생과 (서울) 진관사를 방문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으로, 스님이 직접 작성한 ‘위국선열초혼문(爲國先烈招魂文)의 일부이다. 스님은 1962년 백중을 맞아 동명사에서 김구.안창호.김가진.이상재 선생 등 독립운동가 20여명에 대한 천도재를 지냈다.

○…제2대 국회의원을 지낸 지암스님에게 공무용으로 사용하던 지프차가 한 대 있었다. 국회의원에서 물러난 후 월정사로 돌아왔는데, 기사가 지프차를 갖고 도주해 버렸다. 사중이 발칵 뒤집혔다. 당장 경찰에 신고하여 잡아들여야 한다고 난리였다. 하지만 지암스님은 담담했다. 오히려 “너희가 무슨 권리로 신고하려고 하느냐”면서 꾸짖었다. “자기것을 자기가 가져갔는데, 우리가 뭐 때문에 신고를 하냐. 나는 그 사람이 태워줘서 타고 다녔을 뿐이지. 이제는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 결국 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났다. 지프차를 갖고 도주한 그 기사는 삼척.태백 지역에서 운수업을 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룬 후 지암스님을 찾아와 용서를 빌었다. “스님,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아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이에 지암스님의 대답이 걸작이다. “아니다. 잘했다. 잘했어.”

○…지암스님과 영암스님은 막역한 사이였다. 춘천에 사찰을 창건하기 위해 권선을 받았다.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영암스님이 역 앞에서 날치기를 당해 시주금을 모두 잃고 말았다. 잠시 뒤에 온 지암스님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영암스님을 보고 “자네 왜 그러는가”라고 했다. 이에 영암스님이 “스님, 돈을 그만 날치기 당하고 말았습니다. 어찌합니까” 지암스님은 놀란 표정 하나 짓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난, 영암이가 그릇이 큰 줄 알았는데, (날치기한 사람) 지가 지 돈 가져갔는데 …, 그만 가세.”

○…잘못한 사람이 참회를 하면 스님은 ‘무조건’ 받아 주었다. “잘못했습니다”라고 하면 “잘못했어. 그래 이제는 그러지마”라는 답이 전부였고 뒤끝이 없었다. 성담스님이 어느 날 양치질을 하고 있는데, 지암스님이 찾아 바쁘게 달려갔다. 칫솔을 입에 문채 스님 방에 들어가 크게 야단을 맞았다. 성담스님이 “스님, 잘못했습니다”며 용서를 빌었고, 지암스님은 “으응 그래, 다음부터는 그러지마”라고 용서해 주었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본 다른 스님이 “더 야단을 치지, 왜 그렇게 넘어가느냐”라고 하자, 지암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야. 잘못했다는데 무슨 말을 더 해. 다음에 안 그런다잖아.”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잊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라고 하면 용서를 해 주었다고 한다.

○…지암스님의 상좌 천운스님(원로의원)은 <지암화상평전> 발문에서 은사에 대해 이런 소회를 적고 있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화상(지암스님)이 이르시던바 ‘자기를 양심의 법정에 피고로 내세워 심판을 받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라고 말하면서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자가 되게 하는 것이 곧 모두를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설파하던 한 마디가 아쉽기만 합니다.”

 

행장

조계종 총본산 건립

2대 국회의원 ‘역임’

1884년 1월13일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상광정리에서 부친 이영록(李永) 선생과 모친 경주 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학순(學順)이고, 본관은 전주이다. 태어난 지 13일 만에 모친이 세상을 떠나, 김경윤(金敬允) 선생을 양부로 삼았다. 그러나 1889년에 양부와 양모, 1890년에 양조모까지 별세하여 생가로 돌아왔다.

13세에 양양 명주사에서 백월병조(白月炳肇)스님에게 귀의해 출가했으며, 대은(大隱)스님 뜻에 따라 오대산 월정사 월운(月雲)스님을 시봉했다. 1898년 명주사에서 보룡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고, 1905년 순천 송광사에서 회광스님에게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1900년(17세)부터 1911년(28세)까지 경운.석상.진하스님 등 당대의 강백들에게 외전과 교학을 이수했다. 1905년 순천 선암사 경운스님 회상에서는 진진응.박한영 스님도 함께 공부했다. 1908년 설악산 오세암에서 설운봉인(雪耘奉忍)스님의 법맥을 잇고 지암을 법호로 받았다. 1913년 30세의 나이에 월정사 주지 대리 소임을 맡았으며, 1915년에는 월정사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해 <보조국사법어>와 한글로 된 <초발심자경문>을 강의했다.

1919년 3.1 만세운동에 참가했으며, ‘한성임시정부’에 가담하는 등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듬해 상해임시정부와 국내비밀조직을 연결하는 연통제 활동을 했으며,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감후 월정사 사채를 정리하는 한편,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에 월정사 대표를 참여하고 해방될 때까지 월정사 주지를 다섯 차례 역임했다. 또한 일본불교의 장악의도에 맞서 조선불교 총본산 건립에 나서 종명(宗名)을 조계종(曹溪宗)으로 하고, 태고사(太古寺, 지금의 조계사)를 총본산으로 삼았다. 국민동지회를 조직해 무장봉기를 도모하다 해방을 맞았다.

이후 스님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총무부장, 제2대 국회의원, 동국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주문진 동명사에서 말년을 보내다, 구례 화엄사에서 지냈다. 1969년 9월24일(음) 화엄사에서 입적했다. 세수 86세, 법납 74세. 1977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 받았고, 이듬해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오대산 월정사에도 스님 부도가 있다.

울산=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불교신문 2479호/ 11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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