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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⑩ 석전정호

 

⑩ 석전정호

 

조선은 천길 낭떨어지로 떨어지고 있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던 칠흑같은 일제 강점기. 그러나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이루기 위해 미래를 준비했던 선지식이 석전정호(石顚鼎鎬, 1870~1948)스님이다. 속명인 박한영(朴漢永)으로 더욱 알려진 스님은 “교육을 진흥시키는 자는 마땅히 불도(佛道)를 이루리라”며 인재양성을 강조했다. 오는 4월8일(양력) 입적 60주기를 맞이한 석전스님의 삶을 돌아보았다.

 

 

“교육을 진흥시키면 마땅히  ‘불도’를  이루리라”

   청담ㆍ운허스님 서정주 등 거목 길러내

   계-정-혜 서릿발 수행…인재양성 주력

 

<사진> 박한영 스님이 손에 염주를 든채 개운사 앞마당을 포행하고 있다. 출처=청담조사 사진첩

 

○…석전스님은 개운사에서 학인을 지도할 때 중앙불전 교장도 겸했다. 개운사에서 불전까지 걸어 다녔다. 외출에서 돌아온 어느날. 책상에 놓인 ‘과자’를 집어 무심코 입에 넣었다. 그런데 맛이 특이했다. 시자를 불렀다. “무슨 과자 맛이 이렇게 고약하냐?” 깜짝 놀란 시봉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은 과자가 아닙니다. 세수하실 때 쓰시라고 어느 교수님이 가져온 ‘신식 세수비누’입니다.” 그말을 듣고 스님은 미소만 지었다고 한다. 제자 서정주는 생전에 “(노스님의 그같은 일을 전해 들은) 학인들은 또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졌다”면서 “천진하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지녔던 스님의 일상은 늘 그러하셨다”고 회고했다.

 

○…“공장 굴뚝에서 연기를 뿜는 듯 하는구먼.” 1934년 봄 어느날 개운사 별채 툇마루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미당(서정주)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어느 순간 석전스님이 나타났던 것이다. “육당(최남선)은 서른세살까지 피우던 담배를 역사 공부하려고 끊었다. (너는) 공부하려고 왔다며, 그까짓 것 하나 끊지 못하냐.” 크게 꾸지람을 한 것은 아니지만 몸둘 바를 몰랐다. 미당은 <월간 해인> 기고에서 “꾸지람을 들은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들고 있던 담배를 떨어뜨리고 멍하니 땅만 보았다”면서 “스님의 가슴 속에서 울리는 소리에 쓰라린 눈물이 고여 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석전사(師)을 만나매, 내전이고 외전이고 도대체 모르는게 없을만큼 박식했다.” 석전스님의 한시를 모은 <석전시초(石顚詩抄)> 서문에 육당 최남선이 쓴 글이다. 당시 최고 엘리트였던 최남선은 “나는 누구에게도 물어볼 것이 없는데, ‘석전선생’에게는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다.

위당 정인보도 <석전상인소전(小傳)>이란 글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영과 함께 길을 갈라치면 한국 땅 어디를 가나 그는 모르는게 없다. 산에 가면 산 이야기, 물에 가면 물 이야기…, 이른바 사농공상(士農工商) 무엇에 관한 문제를 꺼내든지간에 화제는 고갈될 줄 몰랐다.” 그외에도 신석정, 서정주, 이광수, 조지훈, 김달진, 김어수 등 당대의 ‘재주꾼’들이 스님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안재홍, 홍명희, 홍종인, 안오성, 모윤숙, 고희동, 김복진, 이동영, 김동리, 오세창 등도 가깝게 지냈다.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민족신문였던 동아일보 창간호에 스님 ‘축사’가 게재된 것도 당시 위상을 비추어 볼 수 있다.

 포교 현대화 생산불교 자선사업 강조

○…어느 법회나 스님에게 법문을 청할 때는 청법가를 한다. 설법을 하게 될 스님이 법상에 오르면 모든 대중이 청법가(또는 청법게)를 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석전스님은 예외였다. 청법가가 끝나기 전에는 결코 법상에 오르지 않았다. “법문은 부처님께서 설하는 것이고, 나도 대중과 함께 부처님 법을 배우는 것인데, 어찌 앞에 나설 수 있겠느냐.” 당신도 불법을 배우는 입장에서 법회에 참석했고, 비록 설법은 하지만 ‘청법을 하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당대 최고의 석학이며, 불교계의 가장 큰 어른이면서도 하심하했던 스님을 누가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석전스님은 불교 유신을 위한 6가지 과제를 제시했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유효한 불교집안의 숙제이다. △참다운 계정혜 △이타행 △학교설립과 인재양성 △포교의 현대와 △생산불교로의 전환 △인민에 대한 자선사업 등이다. 학교 설립과 인재양성은 “고루한 사문적인 훈화에만 힘쓰지 말고 학교를 세워 지식을 보급시켜 영재를 길러야 한다”는 소신이다.

○…스님은 1934년 불교전문학교장 자격으로 신년사를 발표했다. “무한한 고난 없이는 큰 성공이 없다”는 신년사는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였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지(智)에 둥글고 행(行)에 모 나자. 원지방품행(圓智方品行)하야 살자. 품행에 있어서는 좀 더 방정(方正)하고 그 동작에 있어서는 좀더 단정하자. 그리고 언제까지나 취생몽사(醉生夢死)할 것이냐. 각오가 있을 뿐이다. 그 각오야 말로 이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속성(速成)을 바라지 말라는 것이다. 조숙(早熟)하지 말라는 것이다. 무한한 고난이 없이는 큰 성공이 없는 법이다. 무량아승지겁에 만행◎◎하여서 묘익집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 성취가 있기 전에 그 목적을 위하야 무◎의 각고를 쌓고 쌓은 후에야 비로소 위대한 성공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곧 신년을 이바지하여 중생에게 외치는 새 신호이다. 

이성수 기자

 

● 시

스님은 많은 한시를 남겼다. 그 가운데 ‘돌대(石臺)’라는 제목의 시를 소개한다. 이 시는 미당 서정주가 은사의 한시를 모아 정리한 유고 가운데 하나다. 출처는 동국역경원에서 발행한 <석전 박한영 한시집>.

白級層岩頂(백급층암정)

孤庵若爲橫(고암약위횡)

巒山章分穢貊(만장분예맥)

雲海捿蠻荊(운해서만형)

扁額擎虹貫(편액경홍관)

斷碑己蘇生(단비기소생)

有言古井頂(유언고정정)

佛躍跏趺成(불약가부성)

 

백층 바위 꼭대기

가로놓인 외로운 암자

산등성이 하나로 예맥이 갈라지고

구름 바다에 만과 형이 이어지네

 

달린 액자에 놀란 무지개 꿰었으며

끊어진 빗돌 이미 깨어났어라

전설 얽힌 옛 우물 마루

부처님은 벌써 가부좌 틀었네.

 

‘고등불교강숙장’ 활동경력 확인

그동안 책임자가 누군지 정확하지 않았던 고등불교강숙(高等佛敎講塾)의 숙장(塾長)이 석전스님이었음이 확인됐다. 본지는 동아일보 1948년4월14일자 ‘박한영 대종사 입적’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노사는 불교계 유일의 대학자로서 일즉이 고등불교강숙 숙장과 현 동국대학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했다”는 내용을 확인했다. 1914년 7월 30본산주지총회 결의로 불교사범학교는 고등불교강숙으로 명칭이 변경됐으며, 이듬해 11월 중앙학림(中央學林)으로 교명이 바뀌었다.

1914년 7월부터 1915년 11월까지 1년 4개월간 고등불교강숙 책임자가 누구였는지 불분명했으며, 석전스님은 숙장이 아닌 숙사(塾師,강사)로 알려져왔다. 또한 1948년 6월16일자 동아일보는 “시내 수송동 태고사(지금의 조계사)에서는 19일 오후1시부터 조선불교중앙교무대회를 열고 새 교정(敎正)의 선거와 구(舊) 교정 박한영스님의 추도식을 거행한다”고 보도했다.

석전스님의 입적 소식을 전한 1948년 동아일보 기사.

동국대 국문과 김상일 교수는 “박한영 스님이 고등불교강숙 숙장을 지냈다는 사실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다”면서 “숙장을 지낸 사실이 확인되어 스님 행장을 조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 행  장

1870년 8월18일 전북 완주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박성용선생이고, 모친은 진양 강씨였다. 속명은 한영(漢永)이다. 영호(映湖) 또는 석전(石顚)을 법호로 사용했고, 법명은 정호(鼎鎬). 전주 위봉사 금산(錦山)스님의 법문을 전해 듣고 출가를 결심했다. 이때가 17세였다. 이듬해 완주 태조암에 머물던 금산스님의 제자로 출가했다. 장성 백양사 환응(幻應)스님에게 사교를, 선암사 경운(擎雲)스님에게 대교를 이수했다. 1895년 순창 구암사에서 설유(雪乳)스님의 법을 이어 받았다.

1908년 만해(卍海).금파(琴巴)스님 등과 불교개혁에 나섰으며, 1910년 만해.성월(惺月).진응(震應).금봉(錦峯)스님과 함께 임제종을 설립해 조선불교 정체성을 지키려 노력했다.

1926년 개운사 대원암에 불교전문강원 강사로 초청 받았다. 이후 20여년간 불교인재 양성에 주력했다. 1929년 1월 조선불교승려대회에서 교정(敎正)으로 추대됐다.

1945년 초 정읍 내장사로 자리를 옮겨 매곡(梅谷)스님에게 “여기서 세상 뜨려고 왔네”라며 만년을 보냈다. 광복후 전국승려대회에서 교정으로 추대됐다. 1948년 4월 8일 내장사에서 원적했다. 세수 79세, 법랍 61세. 저서로 <정선치문집설> <정선염송급설화> <석전시초> <석전문초> <계학약전> 등이 있다.

한편 석전스님 강맥은 운허용하.운기성원.운성승희.고봉태수.성능복문.철운현종.명봉.학봉 스님으로 이어졌다. 운허스님 맥은 지관.월운.홍법.묘엄스님 등으로, 운기스님은 혜남.도형스님 등으로 계승됐다. 운성스님은 지운.일귀스님 등에게 강맥을 전했다. 또한 고봉스님 맥은 우룡.고산스님과 비구니 일현스님이 받았다. 성능스님의 강맥은 명성.자민스님에게 이어졌다. 월운스님의 맥은 지안, 홍법스님의 맥은 종범스님이 계승하는 등 석전스님의 강맥을 이어받은 후학들이 한국불교 교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불교신문 2412호/ 3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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