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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⑫ 성해남거

 

⑫ 성해남거

 

영축총림 통도사(주지 정우스님)는 불지종가(佛地宗家)이며 삼보사찰 가운데 불보도량이다. 그만큼 통도사는 한국불교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지금의 통도사’는 역대조사들의 정진과 도량 외호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불법홍포와 가람수호의 정신을 몸소 실천한 성해남거(聖海南居,1854~1927)스님의 수행을 살펴보았다.

 

 

“수좌 없으면 혜명 끊기고 원만한 교단 성취어렵다”

  보광선원장 . 불교전문강원장 맡아 ‘도제 양성’

  구하 . 경봉스님 제자 길러 ‘통도사’ 위상 제고

 

사진설명 : 통도사 주지실과 극락암에 모셔져있는 성해스님 사진. 1914년 61세 때 모습이다. 출처=통도사

 

○…“천성이 청백하고 용모가 진중하며 위의가 엄정하고 자비가 초륜(超倫, 범상함을 뛰어 넘다)하며 수행에 전념하고 보사(補寺)에 진력(盡力)하시므로…” 성해스님 비문 가운데 일부다. 스님의 성품과 수행의 일단을 느낄 수 있는 구절이다. 상좌인 경봉(鏡峰)스님이 찬(撰)하고 손상좌인 벽안(碧眼)스님이 쓴 비문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빈한(貧寒)한 환자나 혹 산부(産婦)를 보실 때에는 수력구원(隨力救援, 힘을 다해 구제)하시고 내인거객(來人去客, 오는 사람 가는 사람)에게 승속을 불허하고 항상 관대하시며 대인접물(待人接物, 남과 접촉하여 사귐)에 촌호(寸毫)의 차착(差錯,어그러져 순서가 틀리고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음)을 생한 사례가 없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강제합병을 전후해 먹고 사는 일은 심각한 고민이었다. ‘절집 살림’ 또한 곤궁함을 피할 수 없었다. 스님은 정재(淨財)를 아끼는데 솔선수범했다. 공금(公金)과 사금(私金)을 엄격히 구별했으며, 공금을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다. 통도사 불사 때마다 경리주관(經理主管, 재정 담당 책임자)을 맡고, 불량도감(佛糧都監, 불공에 사용하는 곡식의 관리를 책임지는 소임)을 역임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황화각 경리 소임을 보면서 토지 100여 두락(斗落)을 매입하기도 했다.

○…스님은 평소 “물질로 인해 중대한 과오를 점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스님의 생전 육성이다. “출가인이 비록 대도(大道)는 성취 못할지라도 물질로 인하여 중과를 범하지 아니하여야 한다. 공금을 맡으면 조심하기를 니전(泥田,진흙탕)을 답거(踏去, 걸어서 감)하는 사람이 오니(汚泥, 더러운 진흙)가 결백한 의복에 점착(點着,끈끈하게 달라붙음)할까 두려워함과 상이(相似, 서로 같게 하는 것)케 하리라.”

○…세수 61세 수연(壽宴)을 맞았을 때,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축시(祝詩)를 보내왔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 선생을 비롯해 만공(滿空).혜월(慧月).성월(惺月).침허(枕虛)스님, 서석재 선생 등이 환갑을 축하했다. 장지연 선생의 한시를 우리말로 풀어 소개한다. 통도사 극락선원장 명정스님이 펴낸 <차이야기 선이야기>에 실려있다. “도솔천이 높아 북극성과 이웃하듯이, 산과 바다처럼 장수하실 분, 보리수 늙으니 삼천계에 빛나고, 치자꽃 향기로운 육십춘일세. 공덕은 응당 무량겁에 심어왔고, 자비의 원력으로 중생을 제도하여, 의발을 전해 줄 덕 높은 제자가 많으니, 모두들 분분히 잔을 올리네.”

○…화두참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수좌들의 수행처 마련에 힘썼다. 1892년 통도사 승통(僧統) 소임을 맡은 후 영축산을 찾는 스님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성해스님 나이가 49세 되던 1900년. 쇠락한 조선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경허(鏡虛)스님이 통도사에 왔다. 이듬해인 1901년 7월 만공스님이 통도사 산내암자인 백운암에서 정진했다. 또한 통도사 내원암 선원이 문을 연 것이 1905년이며, 한암스님이 조실로 초청 받아 5년간 납자를 지도했다. 이 같은 정황으로 보아, 성해스님이 주요 소임을 보고 있을 무렵 영축산에 참선 수행가풍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성해스님 비문에는 참선의 중요성을 강조한 대목이 있다. “수좌는 사람의 안첩(眼睫, 속눈썹)에 미모(眉毛, 눈썹)와 같다. 미모는 아무 용처(用處)없는 것 같이 여기나 참 긴요하다. 미모가 없으면 진애(塵埃, 티끌과 먼지)가 입안(入眼)하여 안질(眼疾)이 생(生)하고 또 불구자로 간주한다. 수좌가 없으면 불조의 혜명이 단절되고 원만한 교단을 성취할 수 없다. 종문(宗門)에 선지(禪旨)를 참구하지 아니하는 승려들은 운수납승(雲水衲僧)을 성심으로 외호하여야 도리에 의당(宜當)하다.”

○…성해스님 입적 상황은 경봉스님의 <삼소굴 일기>로 확인할 수 있다. 1927년 1월19일(양력) 경봉스님이 보광별원에 머물던 은사를 찾아갔다. “은사님께 가 뵈오니 스님께서 두통으로 신음하시고 언어불통삼매(言語不通三昧)에 드신지라 이 날이 스님의 열반일인 줄 비로소 깨닫고 선정(禪定)후에 경을 읽다”라고 했다. 은사를 잃은 제자들의 침통한 심경도 일기에 담겨있다. “무여대열반(無餘大涅槃)에 드시니 제자들이 망극함을 이기지 못하고 애통하며 하늘을 우러러 보며 땅을 치다. 오호라! 와도 옴이 없음이여, 달이 천강에 비춤이요, 가도 감이 없음이여, 허공 밖의 모든 국토로다.”

○…스님의 장례는 3일장으로 통도사에서 거행됐다. 마침 설이어서 장례 후에도 빈소에 ‘세배문안’ 드리는 조문객이 많았다. 경봉스님은 1927년 2월2일 은사의 귀적(歸寂)을 기리는 시 한수를 지었다. “劫前有樹本無影(겁전유수본무영) 偶得春風現世眞(우득춘풍현세진) 莫問吾師歸去處(막문오사귀거처) 靈光空寂是靈眞(영광공적시영진)” <삼소굴 일기>에 나온 한글풀이는 이렇다. “공겁전의 그림자 없는 나무가 / 우연히 봄바람 만나 세상에 나왔네 / 은사님 돌아간 곳 묻지를 마라/ 신령한 광명 공적한 것이 이 영진일 세.” 통도사=이성수 기자

 

한암스님이 지은 ‘영찬’ /

성해스님 사제가 한암스님 법사(法師)인 석담(石潭)스님이다. 따라서 성해스님은 한암스님의 사숙(師叔)이다. 경봉스님이 한국전쟁 당시 한암스님 거처를 통도사에 마련해 주겠다고 한 것도 이 같은 인연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한암스님은 경봉스님의 요청으로 성해스님 영찬(影讚)을 지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으며, <한암집>에 나온 한글 풀이를 인용했다.

 

聖海大和尙影讚(성해대화상영찬)

 

勤護三寶(근호삼보)

一片赤心(일편적심)

參尋祖意(참심조의)

透脫古今(투탈고금)

來耶去耶(내야거야)

明月胸襟(명월흉금)

靈鷲山屹(영축산흘)

洛東江深(낙동강심)

부지런히 삼보 수호하기를

일편단심 이었네

조의를 참구하여

고금을 꿰뚫었네

오는 것이냐, 가는 것이냐

밝은 달 흉금일세

영축산 높이 솟고

낙동강 깊으노라

 

 

행  장 /

부산 기장 장안사로 출가

여러 소임보며 사격 일신

사진설명 : 통도사 영각에 봉안된 성해스님 진영.

1854년 6월7일 경남 양산군 서생면 서생리(지금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에서 태어났다. 선친은 김탁진(金鐸振) 선생으로 본관은 김해이다. 모친은 밀양박씨(朴氏). 서생은 임진왜란 당시 최대 격전지로 서생포 왜성 등 당시 유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왜란 후 수군동첨절제사(水軍同僉節制使)를 머물게 하다가 고종 32년(1895) 폐지됐다.

17세에 기장군 장안사로 출가했다. 은사는 취룡태일(鷲龍泰逸)스님. 사미계는 해령(海嶺)스님에게 받았다. 10년 뒤인 1880년 은사를 따라 양산 통도사로 주석처를 옮겼다. 이듬해 율사인 만하승림(萬下勝林)스님에게 대소승계(大小乘戒)를 수지했다.

만하스님은 1892년 조선조 이후 끊어진 계맥을 다시 이어 전승한 스님이다. 또한 성해스님은 눌암(訥庵)스님 문하에서 대교(大敎)를 마쳤다. 이후 화두를 들고 참선 정진했다. 불혹을 앞둔 39세(1892년)에 통도사 승통(僧統)에 취임해 사격(寺格)을 일신하면서 수행종가의 기반을 닦았다. 51세(1904년)에 통도사 총섭(總攝)이 됐다. 1906년 황화각(皇華閣)에 불교전문강원을 설립해 원장 소임을 보면서 10여 년간 후학을 양성했다. 같은 해(1906년)에 통도사는 신식교육기관인 명신학교(明新學校)를 설립했다. 황화각은 지금도 통도사 승가대학으로 사용한다. 스님은 황화각과 동곡루(同穀樓)를 중수했으며, 1911년 부처님진신사리탑을 보수할 때 감역(監役, 지금의 감독)을 맡아 총지휘했다.

61세 되던 1914년에는 보광선원(普光禪院) 원장이 되어 납자들의 화두참구를 지도했다. 이 무렵(1915년) 만해스님이 통도사 강원에서 학인들에게 <월남망국사>를 강의하다 베트남과 조선의 처지가 너무 비슷하여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성해스님은 1927년(정묘년) 음력 12월29일 자시(子時)에 열반했다. 양력은 1월20일 오전 0시20분. 세수 74세. 법납 58세. 성해스님 비는 통도사 부도전에 봉안돼 있다.

구하천보(九河天輔,1872~1965).재하법성(齋河法晟).경봉정석(鏡峰靖錫, 1892~1982).경하달윤(鏡河達允) 스님이 제자이다.

 

[불교신문 2416호/ 4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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