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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② 용성진종

 

② 용성진종

 
지난 11일 서울에 첫 서설(瑞雪)이 내린 날 종로 대각사를 찾았다. 서울을 하얗게 덮은 흰 눈을 맞으며 들어선 대각사는 용성진종스님(龍城震鐘, 1864~1940)이 창건한 도량으로, 스님의 향기와 온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조선 말기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를 관통하며 독립운동과 부처님 가르침을 펼치기 위해 정진했던 스님의 일생은 우리 민족과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치열하게 정진했던 스님의 발자국은 눈밭 위에 고스란히 흔적을 남겨 지금도 후학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모든 것이 무상하고 만법이 다 고요하다”
 
  평생 독립운동과 佛法 선양으로 ‘조국의 미래’ 준비 헌신
 
  3.1운동때 옛땅 포기하는 반도기 반대 … 태극기 사용 주장
 
 
 
“까치가 와서 앉았습니다”
 
○… 1903년 묘향산 상비로암에서 처음으로 수선회(修禪會)를 개설하고 조실로 수좌들을 지도할 때 였다. 강백인 금봉(錦峰)스님이 용성스님에게 물었다. “남전선사가 고양이 목을 자른 말을 하면서 조주선사에게 물었더니 조주선사는 짚신을 벗어 머리에 이고 나갔습니다. 그러자 남전선사가 말하기를 자네가 있었더라면 오늘 고양이 목을 베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는데, 스님의 뜻은 어떠하시오.” 용성스님이 답했다. “문 앞에 선 한 그루 소나무에 까마귀가 날아가자 까치가 와서 앉았습니다.” 금봉스님은 할 말을 잊었다고 한다.
 
<사진> 용성스님 진영.
 
“광명을 놓을 곳입니다”
 
○… 용성스님은 혜월(慧月).만공(滿空)스님 등과 법담(法談)을 나누며 선열(禪悅)의 기쁨을 같이했다. 서산 천장암을 거쳐 덕숭산 정혜사에서 혜월스님을 만났다. 두 스님이 주고 받은 문답이다. 혜월스님이 물었다. “선사는 어디로부터 오셨습니까?” “천장암에서 왔습니다.” 혜월스님이 목침을 들어 보이며 “이것이 무엇인가요”라고 말했다. “목침입니다.” 혜월스님이 목침을 한쪽으로 밀쳐놓고는 다시 물었다. “이럴 경우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소.” “모든 부처님이 광명을 놓은 곳입니다.” 범부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대화지만 두 선지식은 경계에 머물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공부의 방편으로 삼았던 것이다.
 
“조선승려는 ‘축처담육’ 말라”
 
○… 용성스님은 경봉(鏡峰)스님과 많은 서신을 교환했다. 명정스님이 묶은 ‘삼소굴 소식’에는 두 스님이 주고받은 편지들이 실려 있다.  용성스님은 조선 승적을 스스로 없앤 까닭을 밝혔다. “교생(敎生)은 승적을 제거 하였으니, 그 까닭은 조선 승려는 축처담육(畜妻肉, 아내를 두고 고기를 먹음)하고, 사찰 재산을 진모(盡耗, 써서 모두 없앰) 함에 대하여 승수(僧數)에 처할 생각이 돈무(頓無)한 원인이외다.”
 
대각교(大覺敎)를 만든 배경도 서신에 있다. “노한(老漢, 용성스님)은 대각성전(大覺聖前)에 대계(大戒)를 버린 것은 아니니, 본수지계(本受之戒, 본래 받은 계)를 몸과 마음에 굳게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대각성존(大覺聖尊, 부처님)이 나를 버릴 이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현재 승적만 제거한 것이니, 괘념할 필요가 없습니다.”
 
“독립운동 계속 할 것이다”
 
○… 1919년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한 용성스님은 끝까지 독립 성취의 원력을 실천했다. 재판정에서 스님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독립운동을) 하겠다. 조선 사람이 조선독립을 하겠다는데 무엇이 잘못인가”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사진> 용성스님의 창건도량으로 불법홍포의 근원지가 됐던 서울 종로 대각사. 지난 11일 눈이 찾아왔다.
 
3.1 운동 당시 태극기 사용을 제안한 것도 용성스님이다. 만해스님이 “흰 바탕에 푸른색의 대한 반도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했고, 천도교와 기독교장로회측에서도 무방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용성스님은 “반도기를 사용하면 발해와 고구려의 옛 땅을 포기하는 선언임과 동시에 삼천리 반도강산만 대한제국의 영역으로 한정된다”면서 “태극기 물결을 일으키자”고 역설했다. 태극기를 들고 만세운동을 한 배경에는 스님의 이 같은 뜻이 있었다.
 
윤봉길 의사가 상해임시정부로 갈 것을 권유한 것은 물론 비밀리에 독립자금을 마련해 전달했다. 1935년 대각사에서 윤봉길 의사에게 ‘삼귀의 오계’를 주면서 살신성인을 당부했다. 해방후 대각사를 찾아 스님 진영에 예를 올린 김구 선생은 “큰스님께서 독립운동 자금을 계속 보내주어 광복을 맞이하는데 크게 이바지했으며, 윤봉길 의사로 하여금 충절 순국의 사표가 되도록 해주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한글 배워 조선을 일으키자
 
○… 1921년 3월 서대문구치소에서 출옥후 삼장역회(三藏譯會)를 만들어 불경의 한글 번역에 열정을 쏟았다. 1926년 4월부터 1927년 10월까지 양산 내원사 만일선원 조실로 있으면서 ‘화엄경’ 80권을 한글로 옮겼다. ‘왕생가’라는 제목의 한글 찬불가도 만들었다. “불타님의 자비원력 남무아미타불, 도으시고 증명하사 남무아미타불, 일심으로 염불공덕 남무아미타불, 극락인도 하옵소서 남무아미타불” 조선의 독립은 교육과 교화(敎化)를 통해 민족이 깨쳐야 가능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글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것이 스님 생각이었다.
 
“그동안 수고했도다”
 
○… 1940년 음력 1월21일 제자 동헌스님을 찾았다. “이제 절단 나버렸구나. 쇠에서 녹이 슬어 쇠가 상하게 되었구나” 스님은 같은 해 2월23일 동헌스님에게 말을 건넸다. “나는 내일 새벽 관음재일에 가련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구나. 더욱더 수고해 다오.” 다음날 스님은 “수법제자여, 시자여, 대중이여, 그동안 수고했도다. 나는 간다”라는 말씀을 남기고 미소를 보이며 원적에 들었다. 임종게는 다음과 같다. “제행지무상(諸行之無常) 만법지구적(萬法之俱寂) 포화천리출(匏花穿籬出) 한와마전상(閑臥麻田上). 모든 행이 떳떳함이 없고, 만법이 다 고요하도다.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가니, 삼밭 위에 한가로이 누웠도다.”
 
<사진> 대각사 앞에 있는 표지석 위에 내려앉은 눈처럼 스님의 일생은’순박’했다.
 
이에 앞선 어느 날 용성스님은 그동안 여러모로 도와준 최 상궁에게 조선 왕가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면서 사부대중에게 전하는 말을 남겼다. “다음 생에 소가 되서라도 은혜를 갚겠네.”
 
수행자의 위의를 잃지않고, 민족과 불교 그리고 중생을 위해 정진했던 스님의 이같은 겸손한 말씀은 하심하지 못하고 허명(虛名)에 집착하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경책이다. 
 
이성수 기자
 
 
 

오도송

 
스님은 23세 되던 해 신라불교 초전법륜지인 선산 모례정 근처에서 용맹결사 정진 끝에 깨달음을 성취하고 낙동강을 건너면 오도송을 읊었다.
 
“금오천추월(金烏千秋月) 낙동만리파(洛東萬里波) 어주하처거(漁舟何處去) 의구숙로화(依舊宿蘆花)” “금오산 천년의 달이요, 낙동강 만리의 파도로다, 고기잡이 배는 어느 곳으로 갔는고, 옛과 같이 갈대꽃에서 자도다.”
 
 
행  장
 
1864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백상규(白相奎). 손상좌인 도문스님이 생가인 장수 죽림리에 죽림정사를 창건했다. 14세 때 남원 덕밀암으로 출가했다 가족들의 만류로 되돌아 온 용성스님은 16살 되던 해 합천 해인사로 다시 출가해 화월(華月)스님을 은사로 모셨으며, 환성(喚醒)스님의 법을 이었다. 경남 함양 백운산에 화과원(華果院)과 북간도에 농장을 만드는 등 선농병행설(禪農竝行說)을 주창했다. 화엄경을 처음 한글로 번역하는 등 한문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는데 관심을 쏟았다. 박한영(朴漢永)스님과 함께 불교잡지 ‘불일(佛日)’을 간행하는 한편 일요학교를 개설하는 등 문서포교와 어린이포교에도 앞장섰다. 일본불교 영향을 받은 조선불교계 일부가 계율을 소홀히 하고 대처를 합리화 하는 것에 반대해 조선불교 혁신을 꾀했다. 1926년 건백서를 제시한 것이 불교정화 운동의 시원이 됐다.
 
동산스님 등 ‘九弟’  한국불교 기둥으로
 
1940년 2월24일 서울 대각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77세, 법랍 62세. 만해스님이 찬(撰)한 사리탑이 해인사 용탑선원(龍塔禪院) 옆에 있다. 1962년 국가공로훈장, 1990년 은관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다. 저서로 <용성선사어록> <귀원정종> 등이 있다.
동산(東山).동암(東庵).동헌(東軒).인곡(仁谷).운암(雲庵).혜암(慧菴).소천(韶天).고암(古庵).자운(慈雲)스님 등 ‘용성문하 구제(九弟)’라 불리는 제자를 두었는데, 모두 한국불교의 중흥을 이룬 선지식들이다. 도문스님은 국내는 물론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에 사찰을 건립하는 등 스님의 유훈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다.
 
[불교신문 2393호/ 1월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