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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경주 양조암골 파불

 

경주 양조암골 파불

양조암골의 파불이다. 경주 남산에서도 이렇듯 처참하게 부서진 부처님은 또 없다. 법신은 두 동강이 났으며 불두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산산조각 흩어졌지만 다시 자연으로 나툰 부처님

  

점점이 박혀 있던 산꽃들이 이울자 이내 피어나는 신록의 찬란함은 차마 말로 다할 수 없이 아름답기만 했다. 아직 앳된 모습을 한 잎들과 바람이 펼치는 향연은 산길을 걷는 순례자를 희열에 차게 만들었으니 정녕 5월의 시작은 잔인하도록 눈부셨다. 자늑자늑 걷던 산길에서 더러 발길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던 까닭은 갈색 낙엽 위에 맥없이 떨어져 있던 철쭉꽃의 분홍빛 향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 발 한 발, 옮길 때 마다 달라지는 숲 향기의 정체를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 무엇에게서 풍기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향기가 숲에 가득하니 침향이거나 전단향 피어나는 법당이 아니면 어떠랴. 오늘 내가 걷는 이 산이 도량이고 숲이 곧 대웅전인 것을….

 

 

상체 부분, 오른쪽 팔은 떨어져 나갔다.

 

 

 

 

 

 

 

주형(舟形) 광배의 편.

 

 

 

 

 

방형의 불대좌. 

 

그렇게 해거름의 남산을 헤집고 다녔다. 기신기신, 숨을 헐떡이며 능선으로 오르면 그곳에는 한 떼의 바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길을 물어 계곡과 능선을 오르내리기를 서너 차례, 이윽고 눈앞에 불적이 펼쳐졌다. 탑이었다.

산등성이에 걸린 마지막 햇살을 받은 하얀 화강암의 탑은 눈부시게 빛났건만 나는 예경을 올리는 것도 잊어버린 채 망연한 눈길로 그를 어루만질 뿐이었다. 그는 쓰러진 탑이었기 때문이다. 막 봉우리가 터지기 시작한 보랏빛 등나무 꽃 등걸조차 그를 에워싸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 굳어버린 발길을 차마 돌리지 못했으리라.

탑이 기억을 되살리지 못하는 암자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다만 전하기를 이 골짜기를 두고 백운계(白雲溪) 양조암곡(陽朝庵谷)이라고 하며 3층이었을 폐탑은 골짜기의 끝닿은 곳 양지바른 언덕에 있을 뿐 이름조차 알 수 없다. 잼처 주위를 톺아 본 다음 다시 길을 나섰다. 계곡으로 내려 왔으니 이젠 능선으로 오를 차례인가. 본디 가려고 했던 곳이 아니었으니 어쩔 것인가. 능선으로 올라 길의 흔적조차 가뭇없는 곳으로 30분 남짓이나 내려섰을까.

아! 그곳이었다.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한 어둑한 절터에 광배며 좌대 그리고 중대석은 물론 부처님까지 선명한 모습으로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폐탑 앞에서와 같이 그저 눈으로만 부처님을 어루만지기는 이곳 또한 마찬가지였다. 말을 잊은 채 한동안 서성이다가 부처님에게로 다가가기는커녕 광배 편(片)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일까. 차마 부처님에게 눈길 멈추기가 저어했던 까닭이 말이다. 그것은 눈앞의 부처님이 산산조각 나 버린 파불(破佛)이었기 때문이었다. 법당 자리였을 곳에는 민묘(民墓)가 들어섰고 부처님은 축대 아래로 굴러 떨어져 있었다.

그러니 말도 잊고 생각도 그칠 밖에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어둠이 짙어질 무렵 마음을 추슬러 산을 내려 왔지만 밤새 그 모습이 눈에 밟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튿날, 다시 양조암곡으로 향했다. 무량한 햇살은 거침없이 쏟아졌고 드문드문 구름이 수놓은 하늘은 해맑았다. 그러나 점점 부처님 계신 곳이 가까워오자 그 아름답던 신록과 숲 향기에 들뜬 마음은 사라지고 발길은 무거워져만 갔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정겨운 계류를 건너 시누대숲을 빠져 나가자 복련(覆蓮)이 베풀어진 방형(方形) 대좌 편이 햇살을 받고 있었으며 그 곁의 광배 편에는 화염문의 끝자락이 햇살과 뒤엉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석불대좌의 중대석이었을 법한 둥근 돌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을 뿐 선뜻 축대 아래로 내려가지는 못했다.

법당 자리엔 ‘민묘民墓’ 들어서고

길섶에는 연꽃무늬 파편 뒹글어

 

 

눈앞에 펼쳐진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축대 아래로 발길을 옮길 수 있었다. 광배 또한 굴러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던지 내려가는 길섶에 연꽃무늬 선명한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바로 그 옆이었다. 부처님 계신 곳이 말이다.

그러나 서둘러 오느라 향 한 자루 챙겨 오지 못했으니 마음은 더욱 무거웠다. 대신 허연 속살을 하늘로 드러낸 채 앉아계신 부처님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고 무심코 곁의 바위에 걸터앉았는데 엉덩이 아래로 옷 주름이 두어 군데 보이는 것이 아닌가. 유심히 살펴보니 깨져나간 부처님 상체였다.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그러나 부처님 위에 걸터앉는 불경을 저지른 것에 대해 스스로 탓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연을 닮아 간 부처님에게 한없는 경외가 싹 틀 뿐이었다. 비록 산산조각 났을지언정 다시 자연으로 나투시어 내 곁에 머물고 있으니 천지간에 만법이 무량하다는 말이 하나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만 슬픔을 거두었다. 처연한 마음도 던져버리고 계곡을 훑으며 불두나 다른 조각들을 찾는 일 조차 그만 두었다. 남아있는 조각이 토해내는 무언의 설법만으로도 부처님은 미쁘기 그지없으니까 말이다.

모든 움직임 그치고 부처님 뒤에 앉았다. 아니 그나마 형체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곳을 바라보며 누웠다. 허연 속살을 보지 않으려면 내 눈높이를 낮추는 밖에 도리가 없지 않은가. 나뭇잎 사이로 다가 온 바람이 상처를 어루만지고 지나가면 햇살이 그 자리에 머물렀다. 이윽고 그마저 사라지자 푸른 신록이 장막이 되어 부처님을 보듬고 있으니 어찌 아름다운 장면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나라 안 폐사지들을 순례하며 훼불(毁佛)되어 흩어진 부처님들과 숱하게 맞닥트렸건만 이곳처럼 무참한 곳은 처음이어 아득한 슬픔을 어찌 달랠까 싶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더 이상 나를 아프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어떤 모습으로 계실지라도 존재의 여여함은 상실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 제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고 해서 부처님이 돌덩이가 되겠는가. 비록 눈에 보이는 형체가 바위가 되었더라도 그 스스로 잃지 못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불성(佛性)이다. 그렇기에 그로부터 깨달음을 구하지 않는 것은 깨진 부처님이라고 해서 이내 등 돌리고 돌아서 버리는 우리들의 몽매함일 뿐인 것이다. 그는 한낱 계곡에 흩어져 있는 여느 바위처럼 돌덩이가 되어서도 언제나 깨어 있는 것이다.

그처럼 우리 또한 언제나 기억해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의 문제인가, 아니면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문제인가 하고 말이다. 나는 이 장면을 앞에 두고 차라리 흩어진 불신(佛身)을 수습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온전한 부처님에게서 구할 수 있는 깨달음이 있다면 이처럼 산산조각 난 부처님만이 할 수 있는 설법이 따로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우리들의 문제인 것이다. 존재의 여여함과 당당함이 우러나오는 그로부터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눈에 보이는 것이 가슴 아프다고 무작정 덮어 버리는 것은 역사를 상실하는 것과도 같은 일일 것이다.

세찬 바람에 상처입지 않은 풀이 어떻게 존재 할 것이며 삭풍과 눈보라를 겪지 않은 꽃이 어찌 아름답게 피어나겠는가. 하물며 삼국시대로부터 고려와 조선을 거치는 긴 시간동안 불교가 상처 하나 입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불교에 대한 핍박과 박해의 이론적 근거가 된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지은 삼봉(三峯) 정도전(1342~1398)은 “부처를 물리치면 죽어서도 편하겠다.(闢佛爲死而安)”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하니 그것은 죽기 살기로 덤빈 것과 다르지 않다.

조선의 9대 왕인 성종(재위1469~ 1494)과 10대 연산군(재위 1494~1506) 그리고 11대 중종(재위 1506~1544)으로 이어지는 70여년은 불교계의 암흑과도 시기였다.

폐찰과 훼불을 일삼았던 그 험한 시기에 불법을 지키다 제주도에서 순교한 허응당(虛應堂) 보우(1509~1565)대사는 중종 33년인 1538년 9월 28일, 지리지에 기록되지 않은 사찰들 중 경기도와 전라도의 사찰을 시작으로 폐하는 것을 윤허했다는 소식을 듣고 금강산에서 시 한 수를 지었다. “석풍(釋風)이 쇠박(衰薄)하기가 금년만 한 해가 없어 / 피눈물이 잠잠히 갈포 수건을 가득 적시네. / 구름 속에 산이 있다 한들 어디에 의탁할꼬. / 티끌 속에는 내 몸 하나 용납할 곳이 없도다. … 선비 되자니 이미 늙었고 고향 돌아가 농사짓기 또한 늦었네. / 홀로 바람 앞에 서서 눈물을 거두지 못하노라.”

슬픔에 빠졌던 순례자로 하여금

존재의 여여함을 다시 깨닫게 해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분노를 거두지 못한 채 그곳에만 머물러서야 어찌 부처님으로부터 참 된 깨달음을 구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들이 두고두고 되새겨야 할 일이지만 머물 곳은 아니라고 말이다. 홀연히 그 상처로부터 벗어나 오히려 그것을 바라보고 마치 징검다리인양 그것을 디디며 무변광대한 세계로 나아가야 하리라.

어제와 같이 또 다시 찾아 든 땅거미, 산산조각 나 버린 청정법신 앞에서 뜬금없이 점안문(點眼文)을 떠 올렸다. 서경의 중흥사(重興寺)에 불상을 모시며 지은 이규보의 점안문 마지막 구절에 “만물이 제자리를 얻지 못함이 없게 하소서.(無物不得其所)”라고 했으니 오늘 내가 이 부처님 앞에서 머리 조아려 발원하는 것 또한 그와 같다.

 기록문학가

 

■ 특징

 

나말여초 조성 … 파불시기 가늠 못해

 

순례자들의 발길이 뜸한 양조암골은 백운계에 있다. 백운계는 흔히 말하는 남산의 남쪽 자락이며 백운계를 거슬러 오르면 신선암 마애보살좌상이 있는 고위산으로 향할 수 있다.

계곡을 따라 오른쪽으로 열암곡(새갓골), 양조암골 그리고 침식골이 차례로 있으며 그 마지막에 백운암이 있다.

이 세 골짜기에 있는 부처님은 모두 불두를 잃어버렸거나 파불이어서 순례자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새갓골 석불좌상은 2005년 10월 23일, 경주남산연구소의 임희숙 씨가 불두를 되찾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양조암골에는 모두 네 곳의 절터가 있으며 파불이 있는 곳은 1사지로 양조암골의 초입에 해당한다. 남향인 절터 앞으로 계류가 흐르며 입구는 시누대숲이 우거져 있다. 법당 자리였음직한 곳에는 민묘가 들어섰으며 그 언저리에 사각형의 연화문 대좌 편과 광배 편이 있다. 불상은 채 3m가 되지 않는 축대 아래로 굴러 떨어졌으며 법신은 세 토막이 났다.

불두는 찾을 수 없으며 허리쯤에서 또 한 번 깨졌다. 상체는 두툼한 가슴과 오른팔의 옷 주름 흔적은 있으나 나머지는 알아 볼 수 없으며 하반신은 오른쪽 무릎이 깨진 것 말고는 양호하게 남아 있다. 왼쪽 무릎 위나 등을 감싸고 있는 법의의 조각 그리고 광배의 화염문이나 연화문의 조각으로 미루어 당당한 모습의 부처님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불상은 좌상이며 왼손 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하여 다리 위에 올려놓고 있는 것을 가늠 할 수 있다.

파불이 된 시기는 가늠할 수 없으며 또한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짐작컨대 조선시대의 척불을 피해 나왔다면 일제강점기에 그렇게 되지 않았나하고 추정할 뿐이다. 조성 시기는 대략 나말여초 즈음으로 본다.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경주 나들목을 나가서 1.5km 가량 직진하면 오른쪽으로 언양으로 향하는 35번 도로가 나온다. 우회전하여 포석정과 삼릉 그리고 경주교도소 앞을 지나면 작은 사거리가 나오는데 왼쪽은 외동 오른쪽은 박달로 가는 길이다. 외동으로 향하는 904번 도로를 따라 4km 남짓 가면 삼거리가 나오고 왼쪽으로 백운암이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죄회전하여 백운암 이정표를 따라 마을길을 1.7km 남짓 오르면 오른쪽으로 열암곡(새갓골) 석불좌상 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그곳에서 250m 가량 더 오르면 오른쪽으로 자동차 두어 대를 세울 수 있는 공터가 있고 공터 뒤로 길이 있다. 절터 까지는 300m 가량이며 20분 정도면 닿을 수 있지만 표지판은 전혀 없다.

 

[불교신문 2325호/ 5월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