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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경주 율동 마애열반상

 

경주 율동 마애열반상

보일듯 말듯 지그시 눈 감고 편안히 누워 계신 부처님

<사진설명> 경주 율동의 마애열반상은 나라 안에서 발견된 마애열반상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조성 시기는 대략 나말여초로 보지만 그 이전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이다. 2001년 봄이었다. 바람이 드세게 몰아치던 날 오대산 적멸보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갓 돋아 난 새잎들이 동살을 받아 더없이 아름다운 빛깔로 찬란함을 뿜어내던 그 새벽 산길에서 스님 한 분을 만났다. 반갑게 인사하며 그간 안부를 물으니 상원사 청량선원에 방부를 들이고 새벽 포행에 나선 것이라고 했다. 사실 그이는 경주에서 처음 만났었다. 1999년 봄, 꽃이 이울고 신록이 우거지던 경주에 달포 가까이 머물면서 남산을 비롯한 불적들을 순례하며 촬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두대리삼존불을 촬영하러 서너 차례 들렀으나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찾았던 날, 버려져 있다시피 한 암자에 젊은 스님 한 분이 웃자란 풀을 베어 내고 있었다.

 

늦은 오후 촬영을 마치고 돌아 설 무렵 자신도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니 동행을 하자는 것이 아닌가. 마다 할 일이 없으니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마을까지 내려 와 헤어질 때가 되었는데 스님이 불쑥 산 너머에 있는 부처님은 보셨냐고 물었다. 나름대로 충실하게 자료를 준비한다고 했건만 그 스님이 말씀하시는 부처님은 내 파일에 들어 있지 않았다. 더구나 듣도 보도 못한 바위에 새겨진 열반상(涅槃像)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에 귀가 번쩍 열려 꼼꼼하게 그 장소를 알아 놓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철부지 순례자의 마음을 들뜨게 해 놓고 훌쩍 사라졌던 스님을 적멸보궁 가는 길에 다시 만났던 것이다.

경주에서 그 스님을 만난 다음 날, 모든 일정을 뒤로 한 채 산으로 향했다. 나라 안에 마애열반상이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으니 앞 뒤 가릴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허사였다. 온 산을 헤맸건만 부처님은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시 마을로 내려와 구판장을 찾았다. 논일을 하다가 쉴 참으로 막걸리를 마시던 어른들에게 여쭈니 “전에 그 뭐꼬, 태풍 이름도 이자뿟네, 그거 왔실 때 저 뒤에 사당골에 부처님 한 분이 나왔다 하니더, 그거를 묻는 긴가 모리겠시더”라는 것이 아닌가. 재차 그것이 바위에 새겨진 것이냐고 여쭈니 그렇다고 하면서 마을 뒤에 철탑 보이는 쪽으로 쭉 올라가면 큰 바위 하나가 보이는데 그 아래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다시 산으로 올라 홍수로 무너진 계곡을 따라 시누대숲을 헤치고 나서야 부처님 앞에 설 수 있었으니 아! 그날의 감동은 내 삶의 장면들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순간들 중 한 장면이 되고 말았다. 부처님은 촌로들의 말마따나 큰 바위 아래에 새겨져 있었다.

<사진설명> 눈을 일자로 감고 있으며 불두의 크기는 대략 40cm 내외이다.

보일 듯 말 듯,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너무도 편안한 모습으로 누워 계셨던 것이다. 그 앞에서 가슴이 벅차올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으니 심복(心福)이 넘친 것이요, 놀란 눈을 감지 못했으니 안복(眼福)에 겨웠었다. 가까이서 보고, 멀리서 보고 서 있기조차 불편한 곳이었지만 떠날 줄을 모르고 머물렀던 기억이 새로웠다.

 

국내 유일의 마애열반상

조각기법도 국내선 처음 

1998년 태풍 지난후 ‘현신’

 

그 기억을 되살리며 율동 마을길로 들어서니 길을 새로 닦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구판장 언저리에 자동차를 세우고 골목길을 에돌아 익숙한 걸음으로 산길에 들어섰건만 전과는 또 다른 모습이어서 당혹스러웠다. 2003년 12월 11일 통도사로 월하스님 다비식에 다녀오는 길에 발길을 나누었으니 어느덧 4년의 세월이 지난 것이다. 그동안 들머리만 제대로 남았을 뿐 큰 비가 한 차례씩 지나 갈 때 마다 그나마 희미하던 길은 가뭇없이 사라졌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사람들 발길마저 잦지 않으니 멋대로 자란 나뭇가지며 풀들이 뒤덮어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그러나 얼마 전에 누군가가 다녀 간 듯 등산화 자국이 희미하나마 남아 있으니 그저 고맙기만 할 따름이었다.

더욱 울창해 진 시누대숲을 헤치고 나가자 이윽고 오른쪽 어깨를 땅에 댄 채 모로 누워 계시는 부처님 앞에 설 수 있었다. 예를 갖추어 절을 올릴 땅조차도 변변치 않으니 그저 서서 묵례로 손을 모을 뿐이었다. 행여 감은 눈 뜨실까, 적요에 든 마음 헤쳐 놓지는 않을까 싶어 조심조심 상호를 우러르니 그 고요한 모습은 차마 글로 다 옮기지 못하겠다. 생각과 말의 길이 끊어진 언어도단(言語道斷)이요, 말을 떠나고 생각이 끊긴 이언절려(離言絶慮)의 모습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서불진언(書不盡言)에 언불진의(言不盡意)이니 어찌 글이나 말로 그 참 모습을 오롯하게 전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입상진의(立像盡意)이니 그 참 모습을 이 종이 위에 옮기려 애쓸 밖에….

눈에 보이는 그것 말고 더 이상 무엇이 있을까. 그러나 그것 제대로 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며 더구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옮기는 것은 더더욱 힘겨운 일이리라. 성사(聖師) 원효는 〈열반경종요〉에서 열반을 대멸도(大滅道)라 칭하지 않았던가. 흔히 말하는 멸도에 큰 대를 붙였으니 이는 수승(殊勝)하기가 이 보다 앞서는 것은 없다는 뜻일 것이다. 내가 숙연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대멸도에 이른 부처님의 모습이니 어찌 나 스스로 청정해 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진설명> 손은 왼손만 새겼으며 불두에서 손까지 이어지는 조각은 없다.

그저 우러르는 것만으로도 내 속에서는 사멸(事滅)과 리멸(理滅) 그리고 덕멸(德滅)과 택멸(擇滅)이 천둥처럼 큰 소리를 내며 섬광과도 같이 뒤엉켰다간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요란하지 않았다. 스쳐 간 듯 만 듯, 그들이 사라지고 난 뒤 나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텅 비어 버렸으며 나조차도 느낄 수가 없었으니 절로 부처님 앞에 무릎이 꿇어졌다. 아! 그것이었나. 구경각(究竟覺). 언감생심, 그 언저리나마 다다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번개처럼 스쳐 지나간 그 순간을 나는 기억할 것이다.

 

불두와 왼손 두발만 새겨

광배 두광은 없어 ‘특이’

육계부터 발까지 180cm

 

는개가 흩뿌린 마냥 철부지 순례자를 적셔놓고 사라져간 그 순간은 모기 눈썹 사이에 집을 짓고 들락날락거려도 모기가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작은 초명(螟)이 눈을 깜빡이는 순간보다도 빨랐을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그 순간은 남아 있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을 기억하는 것은 무엇인가. 멸(滅)은 멸이되 생(生)한 것, 열반도 그러하리라. 원효는 〈열반경〉을 두고 갖은 경전들의 사상을 통괄하고, 온갖 물의 흐름을 한 맛(一味)으로 귀납시킨 경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곧, 모든 제각각의 쟁론(諍論)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화쟁(和諍)시켜 회통(會通)시키는 것이라고 한 것과 다르지 않으니 열반이란 지극한 깨달음의 극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에 따르면 열반은 존재 그 자체인 법신(法身), 최상의 지혜를 가리키는 반야(般若) 그리고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일컫는 해탈(解脫) 이 세 가지를 고루 갖추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셋은 서로 다른 것이되 또 서로 다르지 않은 일미(一味)라고 했으니 곧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어느 하나가 우뚝하여서는 열반을 이룰 수 없다고도 했다. 곧, 셋은 고루 평등해야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 셋 중 어느 하나가 먼저 이루어져서도 안 된다고 했다. 그것은 그 셋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과도 같다. 마지막으로 그 셋은 별개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것은 그 셋이 하나가 되어 동체(同體)를 이루었을 때 비로소 열반에 다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열반에는 네 가지 덕이 따른다고 했는데 곧 상락아정(常樂我淨)이 그것이다. 그 네 가지 덕은 생사에 집착하지 않으며 또 열반에도 얽매이지 않음으로써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넘어 적정(寂靜)의 즐거움과,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 날 수 있는 깨달음을 아는 즐거움의 덕, 그리고 아(我)와 무아(無我)의 경계에서 벗어나 대아(大我)를 얻음으로써 분별수(分別隨)에서 떠나 자성의 청정함을 나타낼 수 있는 덕이 있다고 했다.

<사진설명> 열반상 곁에 새겨진 명문 

 

 

그만 생각을 그치고 다시 적정의 모습을 한 열반상을 바라봤다. 역시 고요한 것은 강하고 깊다. 그리고 세차다. 그는 단지 적요에 싸여 있을 뿐인데 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말이다. 누군들 이 부처님 앞에 서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까. 일으키지 않아도 절로 마음은 일어나고, 들뜨지 않았음에도 희열에 찰 것이며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못한 것에 대한 분별조차 사라지고 말 것이다. 나라 안 어느 곳에 새겨진 부처님인들 그렇지 않겠나마는 이 열반상 앞에 까지 와서 미술사의 잣대와 불교사의 잣대로 바라보았다면 헛것을 본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적어도 이곳에서 만큼은 열반상을 우러르되 정작 되새겨야 할 것은 자신의 참모습이니까 말이다.

열반상이 새겨진 바위 곁에 명문이 새겨져 있긴 하지만 보는 둥 마는 둥, 또 바위의 동쪽 사면에 불두를 새기다 만 흔적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이미 그늘에 져 버린 탓에 그마저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다시 시누대숲을 헤치고 내려오는 내 머리에 맴도는 생각은 번뇌에 대한 것이었다. 이미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번뇌야 끊으면 그만이겠지만 언제쯤이나 아예 번뇌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과연 내가 그곳에 다다를 수 있을까. 그리하여 상락아정을 얻을 수 있을까. 미처 생각을 그치지도 못한 주제에 생각을 떠날 마음만 일으키고 있으니 눈앞에 흔들리는 것은 시누대가 아니라 못난 내 마음이었을 것이다.

 기록문학가

 

■ 특징

 

나말여초 前 조성 추측

 

나라 안에서 유일한 마애열반상은 1998년 여름, 태풍 예니가 지나가면서 쓸려나간 계곡 덕분에 현신(現身)했다. 그 후 1999년에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7~8m 가량의 큰 바위 아랫부분에 새겨져 있다. 열반상이 새겨진 면은 북면이며 마치 불전처럼 움푹 파인 면에 오른쪽 어깨를 땅으로 향한 채 누워 계신다. 육계로부터 발까지의 길이는 대략 180cm에 이르지만 특이한 것은 완전한 불두 그리고 왼손과 두발을 선각으로 새겼을 뿐 광배나 두광이 없다. 더구나 불두로부터 손에 이르는 몸이 조각된 흔적을 찾을 수 없으며 손에서 발까지 또한 마찬가지이다.

열반상 곁 명문 30자

일부 글자 판독 가능

즉, 불두를 새기고 훌쩍 건너 뛰어 중간쯤에 복부로 향한 왼손을 새겼다. 다시 손 아래 공간은 밋밋하게 두고 두 발을 새겼다는 것이다. 이렇듯 마애열반상이 보고 된 것도 처음이려니와 조각수법 또한 나라 안에서 보지 못한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불두와 손 그리고 다시 발에 이르는 빈 공간에 그림을 그리고 채색을 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채색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황수영 박사의 조사에 따르면 열반상 곁에 있는 명문은 30자 가까이 되지만 무술년(戊戌年) 법태법사(法泰法師)라는 글자만 판독 될 뿐 전체 내용은 파악이 힘들다. 더구나 명문 위로 바위의 동면에 불두가 남아 있어 열반상과 불두 중 어느 것에 대한 명문인지 조차 분명하지 않다. 불두의 길이는 대략 40cm에 이르고 귀는 양쪽 모두 얼굴과 거의 맞닿은 형태로 새겨져 있다.

 

#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경주 나들목을 나가서 150m 가량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율동저수지(낚시터)라는 팻말이 있는 샛길이 있다.

그곳으로 들어가 율동으로 향하는 것이 빠르다. 그렇지 않으면 서악리의 무열왕릉을 지나 고개를 내려오다가 오른쪽으로 법흥왕릉 팻말이 나오면 그 맞은 편 길로 좌회전해야 한다. 보물 122호인 두 대리삼존불을 가기 전에 있는 삼거리이다. 그곳에서 마을길로 들어서서 한과 공장 간판을 따라가면 된다.

공장 앞에 자동차를 세우고 10분 남짓 걸어야 하는데 그곳에서는 마을 사람들에게 길을 묻는 것이 좋다.

 

[불교신문 2323호/ 5월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