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불교유적과사찰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사찰] 가평 현등사

현정론으로 당당함 보인 함허득통 선사 보는 듯 …

“스님 역할은 법을 널리 펴서 중생 이롭게 하여
사람마다 스스로 착하게 하는 것”…‘현정론’ 지어
유학자들의 ‘불교에 대한 맹목적 비판’ 꾸짖은 선사

“고용하게 텅 비어 본래 아무것도 없는데(涵虛)
신령한 빛 밝게 빛나 온 누리 꿰뚫어 비추네(得通)”
자신의 호를 임종게로 설한 함허득통 기화 대사
현등사 200m 능선에 남아 부도로 가르침 전해
운악산(935m)의 아름다움 속에 묻혀있는 현등사는 신라 법흥왕 때 인도 마라가미 스님이 창건하고, 도선국사가 중건하였다. 이후 고려 때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스님이 운악산을 유람하다가 불탑에 등불이 매달려 빛나는 것을 보고 절 이름을 현등사(懸燈寺)라 하였다고 전한다.

“운악산은 얼마나 아득하고 먼 곳인지(雲嶽何) 깔려있는 노을 아침저녁으로 짙으네(霞日夕濃) 가파르게 솟아오른 산들 옥기둥 같고(群矗玉柱) 겹겹 산등성이는 성벽처럼 둘렀구나(疊岡環金墉) 절간은 숲속 안개 속에 아득히 멀어도(招提杳林靄) 몇 리를 나무꾼 발자취 찾아 갔더니(數里尋樵踪) 부처님의 등불 옛 탑에 매달려 있고(神燈懸古塔) 신령스런 울림 저녁 종에 실려 보내네(靈送晩鍾)” 운양 김윤식은 1869년 4월 부처님오신날 현등사의 설화와 운악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고스란히 시에 담아냈다.


함허득통 기화대사 부도. 훼불이 난무했던 시절 ‘현정론’을 지어 유학자들을 꾸짖으며 불교의 당당함을 보인 스님의 기개가 느껴지는 듯하다. 현등사에서 약 200m 떨어진 능선 자락에 있다.


‘배불론’ 맞선 함허득통 선사 자취

현등사는 훼불(毁佛)이 난무했던 시절 <현정론(顯正論)>으로 속 시원히 불교의 당당함을 밝힌 함허당 득통(涵虛堂 得通, 1376∼1433) 기화(己和)대사의 자취가 있어 불자라면 꼭 가봐야 할 사찰이다. 기화대사는 무학대사의 제자로 양주 회암사에서 깨달음을 얻고, 1421년 세종의 청에 의해 개성 대자사(大慈寺)에서 세종의 어머니 명복을 빌고 왕과 신하들에게 법을 설하였다. 이후 효령대군 등 왕실과 교분을 맺으며 대승사, 관음굴, 불희사, 연봉사, 영감사, 현등사 등에서 불사를 일으켰다. 대사는 유학자들의 배불론(排佛論)에 굴하지 않고 유학자들의 불교에 대한 편협한 시각과 맹목적 비판을 바로잡기 위해서 <현정론>으로 유학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논박하였다. 8600자 분량의 글에 유자(儒者)가 질문하고 유자가 대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현정론>에서 “유학자들은 스님들은 무위도식하며 전혀 생산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백성들이 빈궁하게 살아가는 이유가 불교 때문”이라고 하자 기화대사는 반론하여 “스님의 역할은 법을 널리 펴서 중생을 이롭게 하여 사람마다 스스로 착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또 유학자들은 불교의 유해론(有害論)을 들고 나왔다. “불법(佛法)이 중국에 들어온 뒤로 세상이 차츰 야박해지고 또 흉년이 들면서 많은 백성은 살 곳을 잃고 전염병은 날로 심해졌다. 불교의 해로움이 또 크지 않은가” 하였다. 유학자의 억지 논리에 대사는 “공자 같은 성인도 양식이 떨어지는 것을 면하지 못했고, 안회(顔回)가 요절을 면치 못한 것도 불교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 하겠는가?” 하고 적극 불교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유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꾸짖었다.

당당함 보여주는 ‘팔각원당형’ 부도

함허당 득통 기화대사가 문경 봉암사에서 1433년 세수 58세(법랍 38세)로 입적하자 현등사는 봉암사, 정수사, 연봉사와 함께 대사의 부도를 모신 사찰이 되었다. 대사는 자신의 호를 임종게로 바꾸었는데 “고용하게 텅 비어 본래 아무것도 없는데(涵虛) 신령한 빛 밝게 빛나 온 누리를 꿰뚫어 비추네(得通)” 하였다. 기화대사의 부도는 현등사에서 약 200m 떨어진 능선 자락에 장명등과 함께 조성되었다. 부도는 팔각원당형으로 팔각의 지대석과 2단의 대석(臺石)을 올리고 홈을 파서 둥근 몸돌을 끼워 넣었다. 지붕돌은 처마를 살짝 들어 지붕을 높게 올리고 그 위에 연꽃 봉오리 보주를 올려 안정감을 주고 있다. 전면 몸돌에 ‘涵虛堂得通(함허당득통)’이라 음각되어 있다. 대사의 부도를 참배하면 불교의 당당함을 느낄 수 있다.


극락전 전경.


독존 아미타불·회상도…수많은 성보

이와 더불어 현등사에는 많은 성보 문화재가 있다. 먼저 극락전에는 독존의 목조 아미타부처님(17세기 중반 조성)과 그 뒤에는 아미타부처님이 높은 대좌에 앉아 법을 설하는 아미타회상도(1759년)가 있다. 극락전에는 9개의 보령과 앞뒤 용머리를 한 용가(龍駕)가 서쪽 천장에 매달려 있어 영가를 극락으로 인도하는 사실감을 준다. 또 극락전에는 보물로 지정된 봉선사명 범종(1619년)의 이어진 연꽃무늬는 역동적이고 생동감을 주고 있다.


수월관음도. 일반 수월관음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사천왕이 중간좌우를 지키고 있어 특이하다.


이뿐만 아니라 현등사에는 조선 후기 특이한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가 있다. 좌측에는 대나무가 있고, 우측 기암괴석 위에 태극과 팔괘가 새겨진 정병에는 버드나무 가지가 꽂혀 있고 파랑새 한 쌍이 앉고 날고 있다. 위쪽에는 열 명의 백의관음이 천의를 날리며 금방 나타난 듯 생동감을 주고, 수월관음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사천왕이 중간좌우를 지키고 있어 특이하다. 제일 밑에는 해상용왕, 남순동자, 베쉬다라 거사 등 5인이 법을 청하고 있다.

현등사에는 5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불탑이 있다. 자유로운 조각기법을 보여주듯 특이한 모습의 기단은 마치 사리 장엄구를 보는 것 같이 상·중·하 세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운데 돌에는 면마다 둥근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고 위 아랫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지붕돌의 부드러운 처마 곡선 등 각 부분의 양식들은 고려 후기에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칠성도. ‘치성광여래’라는 이름으로 중생들에게 복락을 주고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눈 여겨 볼만한 삼성각 칠성불화

특히 삼성각에는 1861년 화계사에서 조성된 칠성불화를 눈여겨볼 만하다. 우리 조상들은 하늘의 무수한 별 가운데 가장 밝은 북극성이 천재지변을 관장하고 재앙을 물리친다고 믿어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라 하였다. 중앙에는 석가모니불의 윤신(輪身)인 치성광여래가 흰 외뿔소가 끄는 금빛 수레에 앉아 오른손을 들어 법을 설하신다. 힌두교에서는 이 외뿔소가 수레를 끌고 한 바퀴를 돌면 1년이 지난다고 한다. 또 북극성과 함께 북두칠성은 일곱 부처님이 되어 중생의 길흉화복을 살펴준다.

치성광여래의 좌우측에는 보관 위에 태양을 표현한 일광보살이 여의를 들고, 달을 표현한 월광보살이 연꽃을 들고 서 있다. 아래 좌우에는 금관 위에 흰 별을 표시한 칠원성군 7요(曜: 태양,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는 요일이 되었다. 좌측 산처럼 불쑥 솟은 기이한 형태의 대머리 노인은 남극노인으로 이 별을 보는 사람은 오래 산다고 하여 수성(壽星)이라 불렀다. 옛말에 추분(秋分)에 남쪽 하늘에 이 별이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하고, 나타나지 않으면 병란(兵亂)이 일어난다고 했다. 이처럼 석가모니 부처님은 모든 신과 해와 달과 별을 통솔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 치성광여래라는 이름으로 중생들에게 복락을 주고 있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