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살문으로 팔만사천 법을 설하다
'추동기' 저술 장소이자 한국 화엄의 초전지로 여겨지는 영주 성혈사의 볼거리는 역시 팔만사천법문을 담아낸 듯 화려한 꽃살문을 갖고 있는 나한전이다.
성혈사 나한전 꽃살문의 활짝 핀 연꽃은 부처님을
연꽃 봉오리는 보살을, 연잎은 중생을 나타내었다.
물총새 백로 왜가리 물고기 참게 청개구리 용과
꽃살문의 주인공인 동자가 연꽃과 함께 어우러져
야단법석이 난 듯 시끌벅적하다.
어간 문 중간쯤에 있는 동자는 쌍상투를 틀고
연잎을 배 삼아 노를 젓고 있다. 누구일까?
의상법사가 부석사를 창건하기 전 소백산의 깊은 골짜기 비로봉 밑에 풀로 엮은 초막과 굴속에서 머물며 제자들에게 <화엄경>을 가르쳐 ‘1초암(草庵), 2성혈(聖穴), 3부석(浮石)’이란 말이 예부터 구전되어 내려왔다. 제자 지통이 저술한 <추동기(錐洞記)>에 따르면 법사는 소백산 추동에서 90일 동안 3000여명에게 화엄경을 강설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성혈사와 가까운 덕현ㆍ점마 근처를 추목동(錐木洞)이라 부른다. ‘추목’이란 숲의 나무가 송곳처럼 빽빽하게 자라듯 수많은 스님이 송곳처럼 모여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부에서는 ‘추동기’ 저술 장소를 풍기 영전사 근처라 하지만 성혈사가 추동기 저술 장소로 한국 화엄의 초전지(初轉地)로 여겨진다.
나한전 비로자나불과 아라한. 나한들의 모습이 다소곳해 보이지만 눈빛은 선객의 깨달음을 말해주는 듯 맑고 강렬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佛宇)’조에 “성혈사는 초암의 동쪽 골짜기에 있는데 초암과 같은 때 창건하였다. 성자(聖者)가 바위 굴속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혈사’라 했다. 지금도 그 굴이 있다”고 하였다. 의상법사가 머물렀던 성혈은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 놀았던 곳이기도 하다. 옛 추억을 더듬으며 영주에서 순흥을 지나 부석사 방면으로 가다 보면 죽계구곡의 순흥 청(靑)다리와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이었던 소수서원(원래 ‘숙수사’)도 만난다. 청다리에서 죽계를 따라 6.5km 남짓 들어가면 소백산 옥녀봉 동쪽 골짜기에 성혈사가 나온다.
인기 독차지 나한전 꽃살문
나한전은 조선 명종 8년(1553)에 처음 지었고 인조 12년(1634)에 중건하였다. 내부에는 9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되는 석조 비로자나불과 좌우에 석조 16아라한을 모셨다. 다소곳한 모습이지만 눈빛은 선객의 깨달음을 말해주는 듯 맑고 강렬하다. 그래도 인기를 독차지하는 것은 나한전 꽃살문(보물)이다. 꽃살문은 정면 3칸으로 화엄경의 초전지(初轉地)답게 꽃으로 장엄된 세계를 눈으로 보여주고 있다. 바다의 모든 사물이 도장 찍듯 나타나는 해인삼매(海印三昧)처럼 연못 속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비치는 꽃살문을 통해 팔만사천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있으니 과연 대단하다.
꽃살문은 몇 개의 소나무 판재를 빗살에 이어붙인 다음 투각하여 정교하게 연못의 정경을 표현하였다. 활짝 핀 연꽃은 부처님을, 연꽃 봉오리는 보살을, 연잎은 중생을 나타내었다. 물총새, 백로, 왜가리, 물고기, 참게, 청개구리, 용과 꽃살문의 주인공인 동자가 연꽃과 함께 어우러져 야단법석이 난 듯 시끌벅적하다. 어간 문 중간쯤에 있는 동자는 쌍상투를 틀고 연잎을 배 삼아 노를 젓고 있다. 누구일까? 또 어간 문 윗부분에는 비늘을 세우고 잔뜩 구부린 용왕이 앞발로 여의주를 잡고 있는데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용과 물새가 조각된 어간문. 어간 꽃살문은 온갖 동물들이 함께 살아가는 연화장세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노를 젓고 있는 선재동자. 중생들을 생사의 바다인 고해에서 피안의 열반으로 건너게 해주는 뱃사공이 아닐까.
연잎 배 노를 젓고 있는 선재동자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는 법의 배(法舟)의 사공으로 중생들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바른길을 잃었을 때 길잡이가 되어 편안한 곳을 보여준다”고 했다. 연잎 배를 젓고 있는 동자는 중생들을 생사의 바다인 고해에서 피안의 열반으로 건너게 해주는 뱃사공 선재동자를 말한다. 또한 화엄경 ‘구족 우바이를 찾다’편에서 “선재동자는 선지식의 가르침은 연못에 쪼이는 햇빛 같아서 모든 착한 마음의 연꽃을 피게 하며, 선지식의 가르침은 용왕과 같아서 마음대로 법의 구름과 법의 비를 일으킨다”고 했다.
또 입법계품에서는 “모든 공덕의 행은 다 소원에서 생긴다는 것을 선재동자는 분명히 알고 항상 부지런히 닦았네. 용왕이 구름을 일으키면 반드시 비를 내리나니 보살이 소원과 지혜 일으켜 결정코 여러 가지 행을 닦네. 어떤 선지식이 네게 보현의 행 가르치거든 기쁘게 받들어 섬기고 의혹을 내지 말라”고 하였다. 이런 까닭에 나한전 꽃살문 가득 피어난 연꽃은 보현행을 실천하는 중생의 착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또 용왕이 헤아릴 수 없는 신통 변화를 나타낸 것은 부처님의 깊고 미묘한 법을 설하기 위해 법의 구름을 일으키고, 법의 비를 뿌려 중생에게 이익을 주려고 한 것이다.
꽃살문의 새와 물고기가 의미하는 것은?
꽃살문에는 총 다섯 마리의 새가 묘사되어 있다. 물고기를 잡으려고 연못으로 날아오거나 물고기를 잡기 위해 물 밑을 살피거나 물고기를 잡아 물고 있는 모습이다. 불교는 살생을 금하는데 무슨 의미일까? 화엄경 ‘감로화 임금을 찾다’품에서는 “여러 물새의 왕이 마음을 자세히 살피는 것이니, 물고기를 잡을 적에 물 가운데 고요히 서서 일심으로 엿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 했다. 꽃살문의 새들이 물고기를 잡듯 수행자는 자신의 마음을 살펴 집중하고 올바르게 관찰하여 지관(止觀)으로 깨달음에 이르라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꽃살문 아래에는 물고기들이 한가롭게 노닐고 참게들이 기어 다닌다. 물고기들이 물속에서 자유롭게 노니는 모습은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수행자의 자유로운 삶을, 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고 있어 늘 깨어 있는 수행자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게를 조각한 것은 ‘해룡왕처야횡행(海龍王處也橫行), 게는 바다 용왕님이 계신 곳에서도 옆으로 걷는다’는 말을 생각하게 한다. 누가 뭐래도 부처님 말씀에 의지하여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수행자의 굳은 결심을 게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이처럼 어간 꽃살문에는 온갖 동물들이 함께 살아가는 연화장세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모든 존재는 인드라망…또 다른 연화장
좌우 협간의 솟을 꽃살문은 한 폭의 민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어간 꽃살문이 수행을 통한 깨달음을 표현한 문살이라면 협간의 꽃살문은 부처님께서 중생에게 부귀영화를 안겨주는 문이다. 오른쪽 꽃살문 한쪽의 수많은 꽃잎 속에 탐스럽게 피어난 모란꽃은 부귀영화를 상징하여 중생의 소원을 이루어 주는 것을 표현하였다. 왼쪽의 꽃살문은 중첩된 원형의 테두리로 특정 패턴의 반복을 통해 끝없이 이어져 있고, 원형 속에 새겨진 활짝 핀 매화는 하늘을 떠다니는 듯 화려하다. 이 꽃살문을 통해 모든 존재는 인드라망처럼 연결되어 또 다른 연화장세계를 보여준다.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저 연못 속에는 천엽(千葉) 연화가 피었는데 찬란하기 일천 햇빛과 같아 수미산 꼭대기까지 사무쳤다. 금강으로 줄기가 되고 염부금은 꽃판이 되고 여러 가지 보배는 꽃과 잎이며 묘한 향은 꽃술이 되었다” 하여 성혈사 나한전 꽃살문을 나타낸 듯하다. 성혈사 나한전 꽃살문은 정교하고 화려함 속에 빛바랜 소박함을 드러내어 화엄의 진리를 마음껏 토해내고 있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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