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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배재호의 한국의 불상] <22> 고려 불상① 고려초기 왕실 발원의 불상

국왕을 ‘미륵’이라 여겨 불상 조성한 고려인

고려 초기 왕실발원 불보살상
장중한 분위기를 제외하면
조형적 수준 높지 않아 보여

개태사 석조불삼존입상은
후백제와 전쟁 끝낼 수 있게
도와준 붓다께 보답코자 조성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부여 대조사 충주 미륵세계사
당진 안국사 석조상에 영향

918년, 고려가 건국되었지만, 신라가 고려에 복속되고 후백제가 멸망하는 930년대까지 고려 왕실에서는 이렇다 할 불상을 조성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태조(太祖, 918~943 재위, 왕건)는 스님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919년(태조 2)부터 재위하던 동안 26개의 사원을 창건하였는데, 법왕사(法王寺), 왕륜사(王輪寺) 등 이때 세워진 왕경 개경(開京, 개성, 송악)의 사원들은 잦은 내란과 외침에 의해 소실되었다.

물론 이들 사원에 봉안되었던 왕실 발원의 불상과 보살상도 함께 없어져 그 전모를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최승로(崔承老, 927~989)가 982년(성종 1)에 올린 시무책(時務策) 28조 중 불상 제작에 금은(金銀) 사용을 비판한 내용은 고려 초기에 얼마나 많은 불상이 조성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개태사 석조불삼존입상, 고려 936~940년, 불상 4.15m, 좌협시보살상 3.46m, 우협시보살상 3.53m. 사진=김세영

고려 초기 왕실에서 발원한 개경의 불상들은 현존하지 않지만, 태조에 의해 936년부터 940년 사이에 조성된 충청남도 논산의 개태사(開泰寺) 석조불삼존입상(이하 개태사 불삼존상)과 광종(光宗) 때인 970년에 시작되어 목종(穆宗) 때인 1006년에 완성된 논산 관촉사(灌燭寺) 석조미륵보살입상을 통하여 왕실발원 불상과 보살상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기존의 통일신라 불상과는 조형적으로 많이 다른 불상과 보살상들은 고려 초기 왕실 발원 불교 존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936년(태조 19), 개경의 광흥사(廣興寺), 내천왕사(內天王寺), 현성사(現聖寺), 미륵사(彌勒寺)와 함께 조성된 충청남도 연산(連山, 논산)의 천호산(天護山) 개태사는 고려 건국 과정에서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이 지역에 비보사찰(裨補寺刹, 고려 왕조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의도적으로 땅의 기운을 보완하기 위해 세운 사찰)로써 세워졌다.

이곳의 반고려적(反高麗的) 성향은 10세기 후반까지 이어진 듯 태조의 정치 형태를 그대로 답습한 광종(949~975 재위)으로 하여금 계족산(鷄足山)에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조성하게 한다. 태조가 발원한 개태사 불삼존상은 후백제와의 전쟁을 이곳에서 끝낼 수 있게 도와준 붓다께 보답하기 위하여,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고려 국왕(광종)이 곧 미래의 구세주인 미륵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개태사 불삼존상과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석주(石柱, 돌기둥) 형태의 대형 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장중한 분위기를 제외하면, 적절치 않은 신체 비례와 그다지 높지 않은 조형적인 수준으로 말미암아 왕실 발원을 의심하게 만든다. 실제 이러한 모습으로 인해 왕실 발원 불상 임에도 불구하고 지방 장인에 의해 조성된 불상과 보살상으로 여겨져 왔다. 이들 불상과 보살상의 미완(未完)된 모습은 11세기 초까지 고려 왕실 발원 불상의 조형이 아직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개태사 불삼존상은 개태사가 936년에 착공하여 940년에 완성되었다는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따라서 이때 조성된 것으로 본다. 불삼존상은 몸에 비해 머리와 손발이 지나치게 크고, 상체가 하체에 비해 길어서 어색한 신체 비례를 갖추고 있다. 불삼존상은 모두 편단우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있으며, 불상은 넓적한 복련(伏蓮)의 방형 대좌에, 보살상들은 복련의 팔각대좌에 각각 서 있다.

불상과 좌협시 보살상은 부분적으로 보수되었는데, 특히 보살상의 얼굴은 우협시 보살상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옆머리를 살짝 깎은 상태이다. 좌협시 보살상이 착용한 U자 모양으로 드리워진 법의의 꽃무늬 장식은 고려 초기 보살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이다.

불상 왼쪽 어깨 위의 굴곡진 법의 자락, 감입(嵌入) 기법을 연상하게 하는 좌협시 보살상의 장식, 불상과 보살상들의 입술 아래로부터 턱 중앙으로 세로로 패인 선 등은 고려 초기 금동불에서도 보이는 특징이다. 불삼존상의 여러 곳에서는 금동불과 철불에서나 볼 수 있는 표현 기법들이 확인되는데, 이는 석불 조성에 경험이 많지 않던 장인들이 불상 제작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을 추측하게 한다. 

한편 개태사 불삼존상의 존명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기록은 없으나, 사원 완공 후 화엄법회(華嚴法會)가 개최된 점을 통하여 화엄 관련 존상일 가능성이 높다. 보살계제자(菩薩戒弟子, 보살계를 받아 붓다의 제자가 됨)였던 태조가 직접 지었다는 ‘개태사화엄법회소(開泰寺華嚴法會疏)’에는 붓다의 도움으로 후백제와의 전쟁을 이곳에서 끝낼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여러 붓다와 성현(聖賢)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법회를 연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실 발원 불상이 일반적으로 많은 불상들의 모델이 되었던 것과 달리, 현존하는 존상 중에는 개태사 불삼존상의 영향을 받은 예가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고려 970~1006년, 높이 18.12m.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계족산 일부를 깎아 내고 자연석을 대좌로 삼아 그 위에 3개의 돌을 다듬어 쌓아 올려 만든 것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불상과 보살상 중에서 두리새김(환조)된 석조상으로는 가장 크다. 보살상은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가슴 앞까지 들어 올린 양 손으로 금속제 연꽃 가지를 들고 있다.

높은 팔각형 보관(寶冠)과 2단의 장방형 보관을 착용한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팔각형과 장방형 보관이 이어진 곳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고, 장방형 보관의 모서리에는 청동제 방울이 달려 있다. 여러 개의 돌을 포개어 만든 제작 기법, 독특한 형태의 보관, 보살로서 붓다의 대의(大衣)를 착용하고 있는 점 등은 이전의 보살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다. 

보살상은 머리와 양 손이 몸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신체 비례에 원통형의 짧은 목과 좁은 어깨를 갖추고 있다. 이마가 좁고 턱이 넓은 얼굴, 부리부리한 눈, 두꺼운 입술을 가진 큰 입, 살짝 팽창된 듯한 양 볼, 두툼한 이중 턱에서는 종교적인 엄숙함보다는 세속적인 친근감을 느낄 수 있다.

머리카락은 귀를 살짝 덮고 흘러내린 다음 세 개로 갈라져 양쪽 어깨를 덮고 있다. 통통한 손가락과 발가락에는 손톱과 발톱이 섬세하게 다듬어져 있으며, 선각(線刻)으로 처리된 법의 주름은 몸의 굴곡을 따라 유기적으로 표현되었다. 법의 끝자락은 밑에서 올라온 바람에 의해 살짝 뒤집힌 모습이다. 

석조미륵보살입상은 팔각형 보관을 감쌌던 금속판에 불입상(화불化佛)이 새겨져 있어서 관음보살이나 미륵보살로 추정되어 왔다. 백호(白毫) 구멍에서 발견된 묵서(墨書) 기록에 의하면, 보살상은 고려시대 970년(광종 21)부터 1006년(목종 9) 사이에 승려 혜명(慧明)이 장인 100여 명과 함께 관촉사를 창건할 때 조성되었다고 한다.

묵서에서는 보살상의 존명을 확인할 수 없으나 고려시대의 여러 문헌에서 미륵보살로 기록되어 있어서 조성 당시에는 미륵보살의 성격을 지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보살상 발 아래에 표현된 구름 조각과 바람에 뒤집힌 법의 끝단은 <불설미륵하생경(佛說彌勒下生經)>의 도솔천(兜率天)에서 용화세계(龍華世界)로 지금 막 하생한 미륵보살을 연상하게 해 준다. 

반고려적 성향이 강했던 충청남도 논산에서 관촉사 보살상이 조성된 배경에는 어느 정도 정치적인 성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기념비적인 왕실 발원 보살상은 이후에 조성된 보살상과 불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에서 이 보살상을 모델로 하여 많은 보살상과 불상이 조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관촉사에서 시작된 석탑, 석등, 보살상이 한 축을 이루는 배열 방식도 이들 지역에 창건된 사원에 적용되었다. 
 

대조사 석조보살입상, 고려 11세기 전반, 높이 10m.
충주 미륵세계사 석조미륵불입상, 고려 11세기 전반, 높이 10.6m.

관촉사 보살상을 모델로 하여 조성된 11세기 보살상과 불상으로는 충청남도 부여의 대조사(大鳥寺) 석조보살입상, 충청북도 충주의 미륵세계사 석조미륵불입상, 충청남도 당진의 안국사(安國寺) 석조보살입상 등이 있다. 대조사 석조보살입상은 하나의 돌을 깎아 조성한 것이지만, 장중한 분위기, 몸에 비해 머리가 큰 신체 비례, 원통형과 장방형의 보관, 이마가 좁고 턱이 넓은 얼굴, 부리부리한 눈, 보살이면서 붓다의 대의를 착용한 점 등에서 관촉사 보살상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미륵리 석조미륵불입상은 보관이 아닌 보개(寶蓋)를 쓴 불상이지만, 두툼한 양 볼과 부리부리한 눈 등의 조형적인 특징과 6개의 돌을 포개어 쌓아 올려 만든 제작 기법에서 관촉사 보살상을 모델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미륵불입상은 관촉사 보살상이 잡고 있는 금속제 연꽃 가지 대신에 왼손으로 연꽃 봉오리를 쥐고 있다. 관촉사 보살상과 그것을 모델로 한 보살상과 불상들이 많이 조성되면서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이마가 좁고 턱이 넓으며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고려 불상의 조형이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불교신문3638호/2020년12월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