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곡사와 스님 초상화, 진영
경상북도 의성군 비봉산 자락에는 고찰 대곡사(大谷寺)가 자리한다. 통일신라 말엽에서 고려 초에 창건되었고 고려 공민왕 때 인도에서 온 지공(指空)스님이 중창한 절이다. 대곡사에는 많은 유물이 전한다. 대웅전은 17세기 건물로 현재 보물 제1831호이며, 대웅전 앞에는 고려 때 조성된 다층석탑이 자리한다.
불화로는 1764년작 지장보살도를 비롯해 역대 스님들 초상화, 진영(眞影)이 다수 전한다. 지공-나옹(懶翁)-무학(無學)스님을 함께 그린 ‘삼화상(三和尙) 진영’을 비롯해 ‘청허당(淸虛堂) 진영’, ‘사명당(四溟堂) 진영’, ‘포허당(抱虛堂) 진영’, 그리고 ‘보운당(普運堂) 진영’ 등이 대표적인데 모두 조선 18세기에 그려진 것이다. 이 초상화들은 대곡사의 위상과 정통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시각자료이다.
진영으로 만나는 위대한 수행자
실존 인물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초상화’는 회화의 여러 가지 유형 가운데서도 매우 일찍부터 발달했다. 스님들의 초상화 역시 경애와 추모의 차원에서, 때론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증표로 일찍부터 그려져 온 것이 사실이다. 화가들은 깨달음의 길을 가는 수행자, 큰스님들의 살아생전 외형과 위대한 경지의 심상을 제한된 화면에 담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역대 고승 진영을 보면 사실주의에 바탕을 둔 정직한 표현에 내면의 정신세계를 기운생동(氣韻生動)하게 묘사하면서 높은 회화적 성취를 이뤄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매한 전신사조(傳神寫照)의 경지를 잘 보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진영은 짙은 채색들이 대비를 이루는 특유의 화취(畵趣)와 얼굴과 자세에서 풍기는 카리스마로 늘 예배자와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조사(祖師) 숭배와 진영
진영은 불교의 조사신앙이 바탕이 된 종교미술이다. 한국에서 진영의 역사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의 ‘흥법(興法)편’을 보면 흥륜사 금당에 흙으로 빚어 만든 아도(我道), 염촉(厭髑), 혜숙(惠宿), 안함(安含), 의상(義湘), 표훈(表訓), 사파(蛇巴), 원효(元曉), 혜공(惠空), 자장(慈藏)스님, 즉 열 분의 불교 성인이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진영이 제작되기 시작한 시점은 통일신라 말 이후로, 선종의 성행과 연관이 있다.
구산선문(九山禪門)의 개산조(開山祖)와 선사들의 진영이 제작되어 사찰에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애석하게도 당시의 유물 중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비문을 비롯한 각종 문헌을 통해 도의(道義), 신행(神行), 진감(眞鑑), 범일(梵日) 등 스님들의 진영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의 경우도, 의천스님의 대각국사 문집을 보면 진영에 대한 찬문(讚文)이 많이 남아 있어 당시 진영 제작이 활발했음을 엿볼 수 있다.
진영은 세월이 지나면서 손상되면 그 모습을 그대로 이모한 뒤 원본은 땅에 묻거나 소각한다. 그리고 문파의 조사나 유명한 스님들은 여러 사찰에서 각기 그려 모시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의병장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선교 사상에 두루 능통했던 환성지안, 영파성규, 화악지탁 스님들의 진영은 여러 곳의 사찰에서 확인된다. 사찰에서는 스님들의 진영을 ‘조사당’, ‘영각’, ‘국사전’, ‘진영각’ 등에 봉안해 예배를 올리며 받든다.

‘지공-나옹-무학’, 삼화상 진영
진영은 단독상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가장 많지만, 사승(師承) 관계의 세 분을 한 화면에 함께 그린 삼존상, 혹은 사찰과 관련된 분들을 한 화면에 모두 그린 군집상 등 그 형식이 다양하다. 이 중에 ‘지공-나옹-무학’으로 구성된 삼화상 진영이 있다.
지공스님은 인도 사람으로 중국을 거쳐 고려에는 충숙왕 때인 1326년에 들어와 1328년까지 2년 남짓 짧게 머물렀지만 고려불교계에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스님은 개경 감로사(甘露寺), 숭수사(崇壽寺)에 주석했으며, 통도사, 회암사, 화장사, 묘향산 안심사 등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후 원나라로 돌아가 연경(燕京, 현재 北京) 법원사(法源寺)에 머물렀다가 입적하였다.
나옹스님(1320~1376)은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대오(大悟)했다. 이후 원나라로 건너가서 연경 법원사에 머물렀는데, 이때 그곳에서 지공스님의 지도를 받으며 머물다 귀국했다. 귀국 후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은신하였으나 왕의 청에 의하여 신광사(神光寺)에 머무르면서 후학들을 지도했다고 전한다.
무학스님(1327~1405)은 원나라로 가서 지공과 나옹스님을 만나 법을 전해 받았고 귀국 후 나옹으로부터 불자(佛子)와 의발(衣鉢)을 전해 받았으며,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가 되어 조선왕조 건국에 큰 역할을 했다.
삼화상의 부도는 양주 회암사(檜巖寺)에 남아 있으며, 지공스님 초상조각상은 현재 북한 영토인 황해북도 개경시 화장사(華藏寺)에 전해진다. 그 외에는 모두 삼화상 진영으로 남아 있다.
삼화상 진영의 현황
삼화상 진영은 의성 대곡사(1782), 개경 화장사(조선후기), 양산 통도사(1807), 여주 신륵사(조선 말), 순천 선암사(1904년), 그리고 남해 용문사(1900년), 양주 회암사(조선 말) 등에 전한다. 이 중에서 대곡사본, 화장사본, 선암사본, 용문사본은 한 화면에 세 분을 모두 그렸으며, 통도사본, 신륵사본, 회암사본은 총 세 폭이 한 세트로 구성되어 있다.
삼화상 옆에는 각기 ‘서천국조사지공대화상진영(西天國祖師指空大和尙眞影)’, ‘공민왕사나옹대화상진영(恭愍王師懶翁大和尙眞影)’, ‘태조국사무학대화상진영(太祖國師無學大和尙眞影)’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지공스님의 경우는 인도에서 출가 후의 법명인 ‘박타존자(薄陀尊者)’ 혹은 ‘박달타존자(博撻多尊者)’라고도 쓰여 있기도 하다. 화면 중앙에는 지공화상이 자리하며 그 좌측(향 우측)에는 나옹선사, 우측(향 좌측)에는 무학대사가 위치한다.
대곡사에 전해오는 삼화상 진영은 현존하는 삼화상 진영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대곡사 삼화상 진영의 품격
대곡사 삼화상 진영은 비단 바탕에 붉은색, 녹청색, 황토색, 백색 등을 주로 사용해 채색했으며 화면의 크기는 세로 115cm, 가로 234cm이다. 세 분 모두 전신 의자상을 취하고 있으며 석장과 염주, 혹은 불자를 쥐고 있다. 중앙에 자리한 지공화상은 삼산형(三山形)의 관을 머리에 쓰고 있다. 존자들의 얼굴은 가는 선으로 세밀하게 표현해 실재감을 더했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매와 굳게 다문 입, 단정한 자세 등에서는 강직한 기개가 절로 느껴진다.
세 분 스님의 앞에는 각기 경상(經床)을 두고 그 위에 경전, 벼루 및 먹과 붓 등을 올려 두었다. 스님들 사이에는 별도의 탁자를 두고 여러 종류의 과일과 꽃, 붓, 공작 깃털 등을 놓았다. 배경이 되는 상부 벽면에는 연화문, 당초문, 점문을 빼곡히 그려 넣어 장식성을 부각했다.
전국 각지 사찰에 전해지는 삼화상 진영 중에서도 대곡사본은 전체적인 구도, 스님들의 풍모, 사실적인 세부 표현, 그리고 주변 경물과 배경의 장식미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이질적인 것 없이 조화롭다. 1782년 4월에 수화승 수인(守印)스님을 중심으로 보학, 지순, 신오스님이 함께 참여해 그렸다. 당시 진영 불사의 화주는 보운당 덕징(普運堂德澄)이었는데, 스님의 진영도 현재 대곡사에 전한다.
비봉산 대곡사 삼화상 진영은 조선시대 ‘고승 진영의 품격’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수작이자 삼화상 진영의 규범이라 할 수 있다.
[불교신문3628호/2020년11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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