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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58. 설봉학몽

 

58. 설봉학몽

한국불교 선맥(禪脈)을 계승한 설봉학몽(雪峰鶴夢, 1890~1969)스님은 평생 수좌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은 수행자로 젊은 시절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정화불사에 적극 동참하고 제방 선원에서 납자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한 설봉스님의 수행일화를 <만공어록(滿空語錄)> <삼소굴소식> <대한불교(불교신문의 전신)> 등을 참고해 정리했다.
  
  
   
“옛집을 타파해서 돌아가는 날 우주를 감싸네”
 
 
  만공스님 선맥 계승한 평생 수좌
 
  출가 전에는 항일 독립운동 참여
  
  
○…영축총림 통도사 구하스님이 입적했을 당시 설봉스님은 경봉스님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병고에 시달려 곧바로 달려가 영전에 분향예배 못 드림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밝힌 설봉스님은 “그저 슬프고 슬플 뿐이며, 세상 일이 꿈과 같다고 하지만 몰란결에 기절할 지경”이라고 애통한 마음을 표했다. 이 편지에서 설봉스님은 ‘추모 구하노화상 존영’이란 시를 지어 올렸다. “日面佛兮月面佛(일면불혜월면불) / 千眠大悲間不透(천면대비간불투) / 打破舊家歸去日(타파구가귀거일) / 無限淸風遍宇(무한청풍편환우)” <삼소굴 소식>에 실린 한글풀이는 다음과 같다. “일면불 월면불이여 / 대비의 일천 눈으로도 볼 수 없네 / 옛집을 타파해서 돌아가는 날 / 무한한 맑은 바람 우주를 감싼다네.”
 
<사진>설봉스님의 노년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설봉스님은 정화불사가 한창이던 1959년 동안거 때 부산 범어사에서 수좌들에게 <선문촬요>를 강의했다. 이 무렵 설봉스님은 전국 선원 수좌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했고, 납자들이 답장을 보내왔다. 정화불사의 어려운 시기에도 변함없이 안거에 들어가 열심히 정진했던 것이다. 당시 설봉스님은 “덕산 탁발의 이야기에서 암두밀계의 뜻은 어떤 것인지?” “교화와 수련을 위해 행선포교의 방법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질문했다고 한다. 
 
○…어느 해 여름 설봉스님은 부산 광복동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뜨거운 햇볕이 내려쬐고 있었지만 스님은 그늘로 들어가지 않고 길 한복판을 걸었다. 때문에 경적을 울리는 자동차들이 스님 곁을 힘겹게 피해가야만 했다. 이를 지켜본 한 노신사가 스님에게 말을 붙였다. “스님, 어째서 길 가운데로 걸어가시는 겁니까?” 고개를 천천히 돌린 스님은 “지금 세상 어디에 길이 있소”라면서 “내게 말을 건넨 그대는 지금 길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되물었다. 노신사와 스님의 대화를 들은 한 부인이 설봉스님에게 질문을 던졌다. “스님 길이 없다니요. 스님도 지금 길을 가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소이다. 지금은 사람의 길이 없지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부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스님, 길이 없다고요…?” “그렇소 지금 세상은 인도(人道)는 없고 차도(車道)만 있지 않소.”
 
○…납자들을 지도하던 어느 날 설봉스님은 “요즘 사람들이 가엽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스님은 이렇게 답했다. “지금 세상은 제가 제 길을 갈 수 없는 세상 아닙니까. 누구 한 사람 생사까지도 강요받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처음 길은 그런 것이 아니었지요. 사람이 가는 것 그것이 바로 길이었지요.” 여기서 사람은 참선 수행자인 선객(禪客)을 지칭하는 것이다. 스님의 설명은 계속된다. “그러므로 악업을 지은 사람은 악의 길을, 선업을 지은 사람은 착한 길을 가는 것이요. 저마다 인연과 과보를 따라가게 마련인데, 요즘 세상에는 인과가 제 것이 아니란 말이요. 나도 모르게 어떤(남의) 인과에 떨어져 있소. 알 수 없는 일이요. 처음 산하대지(山下大地)가 산하대지가 아니었던가. 문득 깨달았을 때에 산하대지라고 한 옛 스님의 말에 의하지 않더라도 오늘의 인간 삶은 혼돈이요. 자기를 사는 것이 아니고 남을 살고 있어요.”
 
○…누군가 “경허스님은 술이라고 하면 드시지 않고, 곡차라고 해야만 드셨다고 합니다”라며 설봉스님에게 “스님은 어떻습니까”라고 질문했다. 이에 설봉스님은 “술(酒)은 술이고 곡차(穀茶)는 곡차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처럼 대답한 까닭을 궁금해 하자, 스님은 앞서와 같은 답변을 거듭하며, 결국에는 “까닭을 자꾸 말하는데 까닭을 아는가”라고 경책했다. 방하착(放下着)하라는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스님은 이런 말을 남겼다. “경허스님은 취하지 않으려니 곡차이고 나는 취하고 싶으니까 술이지. …… 술을 마시기 위해서 술을 마시면 곡차라고 해도 좋지. 그러나 나는 나를 마시기 위해서 술을 마신단 말이야. 술 속에 담긴 나를 마시는 거야. 술이 들어가 취하면 내가 술이 되고 술이 내가 되거든 술이 된 나는 나를 살지 않고, 술은 살아서 좋고 내가 되니 더 좋고 하지 않은가.” 음주를 즐겼던 설봉스님은 술에 얽매이지 않고, 오히려 합일(合一)의 세계를 거닐었던 것이다. 솔직 담백했던 스님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사진>설봉스님이 경봉스님에게 보낸 편지. 출처=‘삼소굴 소식’
 
○…부산의 한 절에 머물던 스님은 어느 날 휘청거리며 법당에 들어섰다. 비틀비틀 들어선 스님은 “부처님께 절을 올려야지”라며 법당에 엎드려 한참을 일어나지 않았다.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 염송을 마친 스님은 주머니에서 콩을 한주먹 꺼내어 불단에 올리며 “부처님. 저만 먹어 죄송합니다. 부처님도 잡수세요”라고 말한 후 법당에서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신도들에게 “바로 보았나”라고 질문을 던진 스님은 크게 웃은 후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언젠가, 내가 시궁창에 빠져 오물을 뒤집어쓰고 악취를 풍길 때 많은 사람들이 비웃으면서 불가(佛家)를 망신시킨다고 했소. 하지만 망신시킨 만큼 부처님이 크게 돋보일 수 있는 것을 알아야 해.”
 
○…설봉스님은 덕숭산 정혜사 만공스님 회상에서 정진하고 인가를 받았다. 학몽(鶴夢)이란 법호도 만공스님에게 받은 것이다. 인가를 받을 당시 만공스님은 “眞是眞妄是妄(진시진망시망) / 如是眞妄法(여시진망법) / 付與鶴夢禪子(부여학몽선자)” 라는 내용의 법문을 전했다. 한글로 옮기면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참된 것은 참된 것이고, 거짓은 거짓이다 / 이 같은 진망(眞妄)의 가르침을 / 학몽(鶴夢) 선자에게 부촉하노라.”
 
○…<만공어록>에는 만공스님과 설봉스님의 일화가 한편 실려 있다. ‘擧一指示(거일지시)’라는 제목의 글이다. 어느 날 설봉스님이 금선대에 와서 만공스님에게 “부처님께서 꽃을 든 뜻이 어떤 것입니까”라고 여쭈었다. 이에 만공스님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보이자, 설봉스님이 예를 올렸다. 만공스님은 “자네가 무슨 도리를 보았길래 문득 예를 올리는가”라고 물었다. 설봉스님은 “두번 범(犯)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답했고, 만공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청담스님의 조사
 
1969년 4월17일 설봉스님이 입적했다는 소식은 불교계에 충격을 주었다. 오고 가는 것이 세상의 순리이지만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었다. 같은 해 4월21일 부산 선암사에서 거행된 설봉스님 영결식에는 벽안.석암.자운.월산.일타.석암 스님 등 사부대중 300여 명이 동참했다. 당시 장로원장(長老院長) 청담스님은 설봉스님의 원적을 추도하는 ‘雪峰大和尙(설봉대화상)’이란 제목의 조사(弔辭)를 발표했다.
 
“忽見愛人永背信(홀견애인영배신) / 深悟萬事皆無常(심오만사개무상) / 自歸三寶了大事(자귀삼보요대사) / 一盃蕩盡千苦愁(일배탕진천고수) / 或談般若或酒狂(혹담반야혹주광) / 或狂或眞世區區(혹광혹진세구구) / 任他區區吾不關(임타구구오불관) / 生死涅槃元是夢(생사열반원시몽)”
 
 
■행  장
 
신식학문·내전 섭렵
 
한국불교 선풍 ‘진작’
 
설봉스님은 1890년 11월25일 함북 부령(富寧)에서 장영교 선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02년 한성중앙학교(漢城中央學校)에 입학에 신학문을 배웠으며, 이후 공업전문학원(工業專門學院)에 들어가 근대과학을 탐구했다. 조선말기 혼란한 시기였음에도 신식교육을 받을 만큼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1910년 스무 살 되던 해에 조선총독부 문관(文官)으로 취직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항일운동에 관련되어 검거됐다. 이후 출가 전까지 정확한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선총독부에서 파면된 후 한동안 투옥 또는 도피 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1915년 25세에 함경남도 안변의 석왕사(釋王寺)로 출가해 참선 공부에 전념한다. 은사는 김성파(金性坡)스님. 당시 설봉스님은 “세상의 법이 무상함을 종종허환(種種虛幻)으로 깨달아 출가했다”고 한다.
 
<사진>설봉스님의 출가 도량인 안변 석왕사 전경. 출처=‘31본산 사진첩’
 
출가 후 주로 참선 수행에 몰두하던 설봉스님은 1920년 만공(滿空)스님 회상에 머물며 더욱 공부를 깊이 했다. 이어 1925년에는 도봉산 망월사 용성(龍城)스님 문하에서 정진했다. 이무렵 용성스님은 망월사에 활향참선만일법회(活向參禪萬日法會)를 열어 납자들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
 
만공스님과 용성스님에게 선의 진수를 전수받은 설봉스님은 이후 20여 년간 오대산.금강산.설악산.태백산 등 명산에 있는 명찰에서 수행정진에 집중했다. 후학들은 이 무렵의 설봉스님에 대해 “명소대찰(名所大刹)을 주유행각(周遊行脚)하면서 수연도생(隨緣度生)하여 한국불교의 선풍(禪風)을 진작 시켰다”고 평했다.
 
1945년 해방 당시 설봉스님의 세수는 55세였다. 스님은 이때부터는 조선불교의 정통성을 계승하기 위해 선학원 등 서울 지역 사찰에 주석하면서 정화불사(淨化佛事)에 전력을 기울였다. 1955년 불교정화가 어느 정도 궤도에 진입한 뒤에는 남쪽으로 주석처를 옮겨 후학들을 제접했다. 부산 범어사와 대각사.선암사 등에서 머물던 스님은 1969년 4월17일 선암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80세, 법납 55세. <선문촬요> <선관책진> <선문염송> 등의 원전을 현토 주석한 저술을 남겼다.
 
[불교신문 2532호/ 6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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