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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56. 청우경운

 

56. 청우경운

 

한국불교 기틀 조성에 공헌한 청우경운(聽雨景雲,1912~1971)스님은 원만한 성품과 수행으로 후학들의 존경을 받았다. 스님은 이(理)와 사(事)에 밝았고, 무주상 보시와 보은(報恩)을 특히 강조했다. 근세   최근 청우문도회에서 발간한 <양청우대종사 문집>을 참고해 정리했다.

 
 

 
 
“내게는 수행의 채찍…남에게는 진실한 마음”



  부처님ㆍ부모님ㆍ스승 등 은혜 ‘강조’

  석전스님 법맥 계승ㆍ정화불사 ‘동참’


 
 
○…청우스님의 일상은 검소하고 청빈했다. 늘 아끼고 절약하는 모습에 시주와 정재를 소중히 여겼던 스님의 마음과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스님은 소포가 오면 묶은 끈을 자르지 않고 가지런히 풀어 따로 모았다고 한다. 포장지 또한 조심스럽게 잘라 한쪽에 모아 놓았다. 이후에 다시 사용하기 위해서다. 세수한 물은 발을 씻거나 걸레를 빠는데 다시 사용했다. 옷도 다 헤질 때까지 입고 그 후에는 깔개로 쓴 다음, 발수건으로 이용했다. 그마저 쓸 수 없게 되면 잘게 썰어 흙과 섞어 벽에 바를 정도로 아끼고 아꼈다.

○…청우스님이 주지 소임을 맡은 절의 대중은 매일 아침 한자리에 모여 ‘공부’하는 전통이 있었다. 조계사와 대흥사처럼 큰절에서도 스님들은 물론 공양주와 부목까지 전 대중이 참석해 ‘매일법회’를 보았다. 조석예불과는 또 다른 자리였다. 스님은 이 자리에서 대중이 각자 공부한 경전 구절을 낭독하도록 했다.

<사진> 청우스님 진영. 출처=‘양청우대종사 문집’

전 교육원장 무비스님은 “1960년대 청우스님이 주지로 계시던 해남 대흥사에서는 매일 아침 8시면 전 대중이 법당에 모여 30분씩 경전을 읽고 공부를 했다”면서 “부목도 공부를 하고나서 나무를 할 수 있었고, 간만에 찾아온 객(客) 스님도 예외가없었다”고 회고했다.

○…종단 소임과 본사 주지를 맡는 등 바쁜 일과를 보냈지만, 청우스님은 한 차례도 예불에 빠지지 않았다. 새벽에는 시자보다 일찍 일어나 예불에 동참하고, 공양 전까지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외출에 나서 버스를 타고 사찰 앞을 지날 일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합장 반배하면서 부처님께 예를 올렸을 만큼 수행에 철두철미했다.

 <사진> 1930년대 초반 안변 석왕사 불교전문 강원시절의 청우스님(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도반들. 출처=‘양청우대종사 문집’

○…청우스님의 평소 표정은 다소 무뚝뚝해 보였다고 한다. 스님을 처음 보는 이들은 낯설고 어려워 했다. 더구나 말수마저 적었으니 앞에 있는 것이 보통 난감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스님의 내면은 자상하고 온화했다. 특히 수행 정진하는 수좌나 학인들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맞이했다고 한다. 본사 주지 시절에는 교구 말사의 어려운 형편을 세밀하게 살펴주는 일이 많았다. 청우스님은 후학들에게 “스스로에게는 수행의 채찍을, 남에게는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며 위법망구의 신심을 경주하라”면서 “대중을 부처님처럼, 신도들을 신장님처럼, 일반인을 형사처럼 생각하고 언행을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과묵하면서도 온화한 성품으로 대중을 맞이했던 스님이지만, 제자들이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눈물이 쑥 빠지도록 엄하게 혼을 냈다. 스승의 뜻을 어기거나 잘못을 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날은 은사의 회초리로 제자의 종아리가 시퍼렇게 멍들었다. 제자들이 수행자의 길을 바르게 걸어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슷한 일을 겪은 어린 제자를 불러 앉힌 후 청우스님은 수행정진을 당부하는 이야기를 했다. “절의 산수절경이 이 얼마나 좋으냐, 고대광실 같은 집들은 어떻고, 웬만한 부자도 이런 곳에서는 살지 못한다. 다른 망상 부리지 말고 중노릇 열심히 잘 하거라.”

 

 <사진> 1968년 ‘남은 돌 모임’ 도반들과 찍은 사진. 앞줄 왼쪽부터 대의ㆍ운허ㆍ고암ㆍ청담ㆍ영암ㆍ석암ㆍ구산ㆍ벽안ㆍ지월ㆍ청우ㆍ탄허ㆍ석주ㆍ자운스님. 출처=‘양청우대종사 문집’

○…청우스님은 은사이며 법사인 석전 박한영 스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대표적인 일이 스승이 남긴 유저를 모은 <석전문초(石顚文)>를 발간하기 위해 헌신했다. 1940년 최남선이 주도해 발간한 <석전시초(石顚詩抄)> 이후 20여년 만에 박한영 스님의 글을 정리해 <석전문초>를 묶은 것이다. 1962년 청우스님의 수첩에는 당시 상황을 빼곡하게 정리한 메모가 남아 있다. 책자 운반, 노끈 포장지 구입, 효봉.청담스님 등 제방 스님과 각 대학에 발송했던 사실 등 <석전문초> 발간과 배포과정이 상세히 수록돼 있어 동분서주했던 스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사진> 청우스님이 대한불교(불교신문 전신) 창간 무렵 받은 편집위원장 위촉장.

 

청우스님 어록  /


“도를 바로 보려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분별심입니다. 분별심이란 곧 집착과 독선을 말합니다. …… 또 한 가지 도를 바로 만나려면 말이나 형상에 집착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밉고 고운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도 내 마음이요, 신과 우주를 담아 내는 것도 알고 보면 내 마음에서 비롯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마음만큼 위대하고 절대적인 것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출가한 사람이 돈과 명예에 매달리거나 복(福)수용을 즐기는데 탐닉한다면 몸 바꿀 때 가지고 가는 것은 죄업 밖에는 없게 됩니다. 재가자라 할지라도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지 수시로 되돌아보며 살아야 합니다. 탐진치를 계정혜로 바꾸고 부지런히 정진해야 합니다. 공덕은 나누는데서 쌓여가고 수행은 쉬지 않는데서 깊어갑니다.” 
  

 

행 장 /

 

주민 위해 ‘야학’ 개설

불교신문 창간 앞장서
 

1912년 8월25일 평남 성천군 숭인면 창인리에서 부친 양학선(楊學善) 선생과 모친 인동(仁同) 장씨(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경수(景洙)이고, 본관은 청주이다. 1923년 12세에 순창 구암사에서 석전 박한영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때 경운이란 법명을 받았다. 평남 성천 동명학교(1928년)와 건봉사 불교전문강원(1931년)을 수료한 후 안변 석왕사 불교전수강원(1932년)과 서울 개운사 대원불교전문강원(1934년)을 졸업했다. 1934년 7월 광주(지금의 서울 강남) 봉은사에서 보련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고, 석전스님에게 청우라는 당호를 받았다.

<사진> 고창 선운사에 모셔져 있는 청우스님 비.

청우스님은 이후 평남 안국사 주지(1935년) 소임을 보면서 야학(夜學)을 개설하고, 주민을 위한 소비조합을 만들어 일제강점기 동포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또한 평양 영명사.묘향산 보현사.금강산 유점사.안변 석왕사.장성 백양사에서 안거에 동참했다.

백양사에서 대선(大禪) 법계를 품수 받은 청우스님은 1944년 석전스님에게 전법게를 받고 법맥을 이었다. 이듬해에는 한암스님에게 보광(寶光)이라는 호를 받았다.

해방 후에는 동산.청담.금오.지월스님 등과 함께 정화불사에 적극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제3교구 본사 건봉사 주지로 취임하고, 탄허스님과 오대산 수도원과 상원사 봉찬회를 결성해 수행종단 수호를 발원했다. 총무원 총무부장, 대한불교신문사(현 불교신문) 편집위원장, 중앙종회의원, 제22교구본사 대흥사 주지 등을 역임하며 한국불교의 초석을 놓았다.

스님은 1971년 10월3일(음력 8월15일) 대흥사 동국선원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60세, 법납 49세. 부도와 사리탑비는 법왕사, 대흥사, 선운사에 나눠 모셨다.

청우스님의 제자로는 동성(東星) 재덕(在德) 도홍(道弘) 기산(其山) 도륜(道輪) 도열(道悅) 법진(法眞) 정암(靜庵) 법정(法政) 재원(在圓) 도훈(道薰) 정봉(正奉) 도수(道守) 스님 등이 있다.


[불교신문 2528호/ 5월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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