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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20. 학명계종

 

20. 학명계종

 
일제강점기 ‘선농일치(禪農一致)’를 몸소 실천하며 조선불교 정체성을 지키고, 불법을 널리 펴고자 했던 학명계종(鶴鳴啓宗, 1867~1929) 스님. 고난의 세월에 맞서 고고한 학처럼 살다간 우리 시대의 선지식이다. 말과 구호에 멈추지 않고, 실제로 부처님 가르침을 구현했던 스님의 삶을 <백학명 대종사 문집>과 김종진 박사(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의 논문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도를 닦고 덕을 밝혀 불조에 부끄럽지 말라”
 
 
  반농반선 몸소 실천하며 불교 혁신 원력 실천
 
  황무지 개간 앞장 만해스님 최남선 극찬
 
                                           
○…스님이 태어난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외세의 침략과 부실해질 대로 부실해진 왕조는 민초들의 삶을 피폐하게 했다. 스님은 어려서 붓 만드는 기술을 익혀 필상(筆商)이 되었다. 전국 각지를 돌며 가족을 부양했던 스님은 20세 되던 해 순창 구암사에 붓을 팔기 위해 들어섰다. 조선 최고의 강원으로 젊은 스님들이 공부에 전념하고 있던 구암사에서 스님은, 간경(看經)하고 참선(參禪)하는 학인들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이무렵 구암사에서는 조선 최고의 강백(講伯) 설두(雪竇)스님이 후학을 지도하고 있었다.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 정진하는 모습에 “과연 삶의 참된 의미가 무엇일까”하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그길로 고향으로 돌아온 스님은 영광 불갑사의 환송(幻松)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어 금화(錦華)스님에게 수계를 받았으니, 이때가 1886년이었으며, 3년간 불갑사에 머물며 수행했다. 당시 받은 법명이 계종(啓宗)이었다.
 
<사진>정읍 내장사에 있는 학명스님 비.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최남선이 남긴 <심춘순례(尋春巡禮)>에는 학명스님이 어떤 분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글이 실려있다. ‘노동의 즐거움’을 구하며 불법을 체득하려 했던 학명스님의 체취가 느껴지는 글이다.
 
“… 다만 선사의 깊은 증오(證俉)와 날카로운 기봉(機鋒)이 이곳을 선불장(選佛場)으로 하여 크게 현양 발휘되기를 바라는 이가 물론 나뿐이 아닐 것이다. 더욱 맹봉치할(盲棒痴喝)을 격외지(格外旨)로 알고 종욕난행(縱慾亂行)을 대승선(大乘禪)으로 자랑하는 이판에, 정풍선양(正風宣揚).진종부립(眞宗扶立)을 위하여 해오양전(解悟兩全)한 사(師) 같은 이의 노력이 크기를 절망치 않을 수 없다.” 최남선은 스님에 대해 “정전(庭前)에 고괴한 나무 등걸을 열지어 벌여 놓고 명화이초(名花異草)를 곳곳이 식재(裁植)한 것은 빡빡한 듯하고, 실상 작작(綽綽)한 운치를 가진 사(師)의 풍모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방생지(放生池)를 만든다, 저수지를 경륜한다, 무릇 법계(法界)를 장엄할 만한 모든 시설은 힘자라는대로, 아니, 힘에 겨웁도록 비심비력(費心費力)하여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대로 두지 못하는 그의 성격은, 반드시 내장(內臟) 부활의 큰 주초(柱礎)를 놓고야 말리라”고 경탄했다.
  
○…스님의 수행은 철저했다. 잠시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았으며, 백장청규를 엄격하게 구현했다. 스님이 지은 내장선원 규칙에는 이같은 선사의 뜻이 올곧이 담겨있다. 반농반선(半農半禪).자선자수(自禪自修)를 근간으로 조선불교의 혁신과 개혁을 꿈꾸었던 것이다.
 
“선원의 목표는 반선반농으로 변경함. 선회(禪會)의 주의(主義)는 자선자수하며 자력자식(自力自食)하기로 함. 회원은 신발의(新發意)나 신출가(新出家)를 모집함, 단 구참납자(久參衲子)도 근성(勤性)이 유(有)한 이는 환입(還入)함. 일용(日用)은 오전 학문, 오후 노동, 야간 좌선 삼단으로 완정(完定)함. 동안거는 좌선위주, 하안거는 학문과 노동위주로 함, 단 안거증은 3년 후 수여함. 법음(法音)은 시세(時勢)에 적합한 청아한 범패를 학습하며 또 찬불(讚佛) 자찬(自讚) 회심(回心) 환향곡(還鄕曲)을 신작(新作)하거나 창(唱)하기로 함.”
 
○…스님은 만해(卍海, 1879~1944) 스님과 막역한 사이였다. 조선불교의 혁신을 꿈꾸었다는 공통점 외에도 수행자로서 뜻이 통했다. <한용운전집>에는 두 스님의 가까운 관계를 시사하는 한시(漢詩)가 실려있다. ‘양진암을 떠나면서 학명선사에게 준 두 수(養眞庵臨發贈鶴鳴禪伯二首)’라는 글이다. “世外天堂少(세외천당소) 人間地獄多(인간지옥다) 佇立竿頭勢(저립간두세) 不進一步何(부진일보하)” “이 세상 밖에 천당은 없고 인간에게는 지옥도 있는 것, 백척간두에 서 있는 그뿐 왜 한걸음 내딛지 않는가.” 또 한편의 한시는 이렇다. “臨事多艱劇(임사다간극) 逢人足別離(봉인족별리) 世道固如此(세도고여차) 男兒任所之(남아임소지)” “일에는 어려움 많고 사람 만나면 헤어져야 하는 것, 본래 세상 일은 이와 같거니 남아라면 얽매임 없이 뜻대로 살리.”
 
○…비록 출가사문이었지만 효심(孝心)이 깊었다. 스님이 출가했을 무렵은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정도로 농촌의 삶은 피폐했다. 꼬박꼬박 끼니를 때우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 처럼 어려웠으며, 그나마 있는 식량은 부패한 관리들이 뺏어갔다. 일반 민가는 물론 절집도 겨우 목숨을 연명할 정도였다. 스님은 끼니마다 당신의 공양을 조금씩 덜어 놓았다. 말리면 부패하지 않는 누룽지를 모았다. 그리고는 마을에 있는 어머님을 찾아가 누룽지를 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쑥만 삶아 드시면 몸이 붓고 아프게 됩니다. 우리 몸에는 곡기(穀氣)가 들어가야 연명을 하게되니 이걸 꼭 넣고 죽을 쑤어서 드십시오.” 출가한 몸이기에 어머니를 만나더라도, 마루에 앉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당신이 출가자의 신분임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며, 모친 또한 아들의 속명을 부르지 않고, 깍듯이 스님이라고 호칭했다. 이후 스님은 어머니에게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할 것을 당부했고, 모친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스님이 마련해 준 염주를 손에서 놓지 않고 나무아미타불을 간절히 염송했다고 한다.
 
○…내장사 주지 소임을 맡은 스님은 황무지를 일구었다. 논과 밭을 개간하여 식량을 확보하여 ‘절의 살림’을 키웠다. 지금은 어느 자리가 당시 개간한 땅인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무상한 세월 속에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다만 내장사 벽련암 만세루에 걸려있는 한 장의 사진이 일제강점기 어려웠던 불교계의 모습을 대변할 뿐이다. 1920년대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흑백사진에는 한국전쟁으로 전소되기 이전의 벽련암 모습과 도량앞에 있는 밭이 담겨있다.
 
정읍=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독(獨) 살림하는 법려(法侶)에게 勸(권)함
 
불법을 통해 교단을 구하고 조선을 살리려 했던 학명스님은 수행정진에 몰두하지 않고, 다른 것에 한눈을 파는 승려들에 대해 따끔한 일침을 가했다. 1929년 8월 <불교>에 발표한 글은 지금도 유효한 가르침이다. 내용 일부를 요약했다.
 
“근일(近日)에 우리 조선의 승려 되는 자(者)로 말하면 승려라는 것이 어떤 물건인지도 알지 못하고 부처와 조사(佛祖)의 본의가 어떠한 것인지도 알지 못하고 거의 대부분이 출가 입산하는 날부터 몸만 한적한 운림(雲林)에 집어 던지고 눈은 재물과 이익의 주선(周旋)에 혈안이 되어 … 내가 원하는 바는 우리 법려가 오직 도(道)만 닦으며 오직 덕(德)을 밝히며 오직 공심(公心)을 행하며 오직 정도(正道)로 돌아가서 이렇게 이렇게 쉬지 말고 쉬지 말아서 평등한데 이르고 평등을 쓰게 되면 그 깨달음은 무연(無緣)에 계합(契合)하고 다시 유연(有緣)을 제도하리니 그때에는 옛 조사(古祖師)에게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을 뿐 아니라 마땅히 불조(佛祖)와 더불어. … ”
 
<사진>내장사에 봉안된 학명스님 부도.
 
 
#스님이 남긴 ‘선원곡’
 
교학에 밝았던 스님은 많은 글을 남겼다. 가사 형식의 글도 수십편 지었다. 일제 강점기에 발행된 <일광> 2월호에 실렸던 ‘선원곡’일부를 소개한다. 이 자료는 김종진 박사(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가 발굴한 것이다.
 
“야야우리 동무님네 흾ㅇ파면서 노래하세. 호미잡고 한번파니 一生參學 이아닌가. 호미잡고 두번파니 二八靑春 조흔ㅼㅐ다. 호미잡고 세번파니 三生因緣 반가워라. 호미잡고 네번파니 四大色身 虛妄하다. 다섯번재 파고나니 五瑚烟月 行脚하세. 여섯번재 파고나니 六根淸淨 아니될가. 일곱번재 파고나니 七顚八到 닷시할가. 여덜번재 파고나니 八識風浪 고요하다. 아홉번재 파고나니 九天明月 닷시본다. 열번파고 쉬엿스나 十十無盡 나아가세. (중략). 훔처잡은 호미자루 ?리업는 木佛인가. ㅺㅘㅇㅺㅘㅇ맛는 쇠소리는 變치안는 鐵佛인가.…土佛石佛 두어두고 나의眞佛 무엇인가. 空山夜月 杜鵑새는 그저故國 不如歸라.…”
 
 
#행장
 
1867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 방마리 방뫼마을 223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백중수(白重洙), 모친은 한양조씨(漢陽趙氏)였다. 스님의 속명은 낙채(樂彩)였다. 모친이 방마산 꼭대기까지 높이 뜬 해가 갑자기 치마 속으로 떨어지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백파선사 7대 법손
 
선우공제회도 참여
 
부친은 1886년 12월27일(음력) 4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편모을 봉양하고 동생을 돌봐야 했던 ‘소년 낙채’는 붓 장사에 나섰다. 천하를 돌며 필상(筆商)으로 연명하다 순창 구암사 강원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의 모습을 보고 출가를 결심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속세의 일을 정리한 후 영광 불갑사에서 부처님 제자가 됐다. 이때가 1887년 2월이었다. 환송스님의 허락을 받은 후 금화스님에게 계를 받고 수행정진했다. 불갑사에서 3년을 머문뒤 학명스님은 구암사 강원에서 내전을 익혔다. 이후 지리산 영원사, 벽송사, 조계산 선암사, 송광사 강원에서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두루 마친후 설유(雪乳)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학업을 마친 스님은 금화스님에게 건당하며 백파선사의 7대 법손(法孫)이 됐다. 이때 받은 법호가 학명(鶴鳴)이다.
 
스님은 그 뒤로 구암사와 백양사 운문암에서 강회(講會)를 열고 후락을 제접했다. 하동 쌍계사, 부안 내소사, 변산 월명암 등에서 수행정진했다. 이 무렵 만응(萬應)스님과 만암(曼庵)스님과 가까이 지내며 퇴락한 조선불교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월명암 선원을 비롯해 내소사.운문선원에서 정진했고, 조선불교 수호를 위해 당대의 선지식들이 창립한 선우공제회(이후 선학원)에도 참여했다.
 
1923년부터 정읍 내장사를 중수하고, 논과 밭을 개간하는 등 ‘일과 선’이 둘이 아니라는 선농일치 사상을 몸소 실천했다. 1929년 내장사에서 입적했다. 세수는 63세. 법랍는 43세였다.
 
[불교신문 2437호/ 6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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