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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19. 경운원기

 

19. 경운원기

1911년 일제는 친일 승려들을 앞세워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연합맹약(聯合盟約)을 맺고 조선불교를 장악하려고 했다. 이때 만해(卍海).석전(石顚).진응(震應) 스님 등은 임제종(臨濟宗)을 설립하여 조선불교 수호에 나섰다. 일제에 맞서는 조선불교의 중심으로 설립한 임제종의 관장(대표)으로 추대된 고승이 경운원기(擎雲元奇, 1852~1936)스님이다. 일제 암흑기 조선불교를 지키려는 스님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스님은 교학은 물론 조선불교 수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비문과 <삼소굴소식> < 근대고승명인서한집> 등을 통해 경운스님의 삶과 수행을 살펴보았다.

 

 

“덕을 쌓아야 부처되니 하나도 소홀히 말라”

  만해스님 등과 임제종 세워 조선불교 ‘수호’

  제봉 영호 진응 월영 스님 등 강백 양성

 

○…순천 선암사 경내에 있는 경운스님 비는 1940년에 세운 것이다. ‘화엄종주경운당대사비(華嚴宗主擎雲堂大師碑)’라는 이름이 붙은 스님의 비는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가 찬(讚,인물이나 사물을 기리어 칭찬하는 글)을 했고,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이 글씨를 썼다.

당대의 지식인이자 항일의 중심이었던 정인보와 오세창이 경운스님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더구나 1940년은 탄압이 극심했던 시절이었음을 고려할 때 정인보와 오세창 등 민족 지사들이 스님의 입적을 안타까워하며 찬과 서(書)를 했다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한편 비문에서 정인보는 ‘映湖來求文(영호래구문)’이라고 쓰고 있는데, 영호스님(석전 박한영)이 정인보에게 (비문의) 글을 부탁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석전스님은 경운스님에 대해 “조계가풍을 전했다(傳曹溪家風)”는 내용의 음기(陰記, 비석의 뒷면에 새긴 글)를 남겼다.

<사진설명> 임제종 관장과 조선불교 교정으로 추대되는 등 일제불교에 맞선 경운스님. 제공=민족사 刊 ‘한국불교100년’

○…경운스님 비에는 수업문생대표(受業門生代表) 명단이 있다. 스님 문하에서 경학을 배운 제자들로 제봉영찬(霽峰永讚).영호정호(映湖鼎鎬).진응혜찬(震應慧燦).월영처관(月泳處寬) 등 모두 4명의 스님 법명이 기록돼 있다. 이 스님들은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당대의 강백(講伯)으로 조선불교 교학에 일대 획을 그은 스님들이다. 억불의 시기를 지나 일제강점기에도 후학양성에 매진했던 경운스님이었다. 경운스님은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수백년 쌓여있는 대장경을 보고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며 정진하고 또 정진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근세고승명인서한집>에는 경운스님이 제자에게 보낸 편지가 여러 통 실려 있다. 정묘년(丁卯年, 1927년) 9월20일(음력)에 쓴 편지에서 스님은 제자에게 이렇게 당부하고 있다.

“내가 모여 바다를 이루고, 티끌이 모여 산을 이루며, 털이 모여 머리를 형성하듯, 우리 부처님은 덕을 쌓아 부처가 된 것이니 털끝 하나도 소홀히 하지 말라.” 작은 일을 소중히 여기고, 언제나 방심말고 수행정진하여 정각의 경지에 오를 것을 당부 하는 내용이다.

무진년(戊辰年, 1928년)에 쓴 편지에서 스님은 “초입자들은 겨우 글자를 익히는 선비에 불과하다”며 “철저한 정진만이 성공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후학들을 경책하고 있다.

<사진설명> 경운스님이 그린 그림. 손상좌에게 보낸 편지에 들어 있다. 출처=근대고승명인서한집

○…경운스님은 제자 석전스님의 생일을 맞아 한편의 송(頌,공덕을 기리는 글이나 문장)을 지어 보냈다. 경오년(庚午年, 1930년) 8월19일이다. 한문으로 된 편지인데, <근세고승명인서한집>에 실린 한글 풀이는 다음과 같다.

“옛날 남순(南巡)에선 나를 따라 다니더니, 소요함에 한결같이 놓인 배와 같아라. / 용서린 바리때엔 항상 짐 가득하고, 호랑이 새긴 지팡이엔 명성이 들어났네. / 그윽한 향기 찾아보면 반듯이 이유가 있고, 텅빈 지혜 넓은 기량 짝할이 없네. 세월은 빨라 마치 북치듯 하는데, 촌음을 아껴 경본지 벌써 40년이 흘렀어라.”

○…학식이 높았던 스님은 명필(名筆)로도 유명했다. 걸림없이 흐르는 자유로운 필체는 물론, 정성이 듬뿍 담긴 글씨는 만인의 부러움을 샀다. 스님은 강백뿐 아니라 사경사(寫經師)로도 유명했다. 경전을 그대로 옮겨 쓰는 사경은 수행의 방편. 스님이 1890년 명성황후의 발원으로 사경한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이 현재 통도사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스님이 사경할 때 방에 들어온 족제비가 나가지 않자, ‘좋은 붓’으로 글을 써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여, 꼬리털 일부를 잘라 붓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정필(淨筆) 2자루로 3개월간 일자일배(一字一禮)하며 정성을 다해 사경을 했다. 또한 선암사 비로암에서는 5년 동안 일행삼배(一行三拜)하며 80화엄경을 20여권으로 나누어 사경했다.

○…스님은 1929년 1월 경성 각황사에서 열린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에서 교정(敎正)으로 추대됐다. 이때 7명의 교정이 추대됐는데, 모두 당대 고승으로 조선불교의 중심에 있던 어른스님들이다. 7명의 교정과 소속 사찰은 다음과 같다. 김환응(金幻應, 백양사).서해담(徐海曇, 통도사).방한암(方寒岩, 오대산 중대).지동선(지동선, 유점사).박한영(朴漢永,개운사).이용허(李龍虛, 법주사).김경운(金敬雲, 선암사) 스님. 이때 교무원 서무부장은 이혼성(李混惺), 교학부장은 송종헌(宋宗憲), 재무부장은 황경운(黃耕雲)스님이 선출됐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후학들에 대한 당부 /

“죽을 힘을 다하여 마군에 포섭되지 말라”

 

경운스님이 제자 진응스님에게 보낸 편지에 석전스님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제자들의 정진을 당부하는 글을 남겼다. <삼소굴소식>에 실린 한글풀이는 다음과 같다. 

<사진설명> 경운스님이 진응스님에게 보낸 편지. 출처=삼소굴 소식

“서울에 사는 박한영 스님과 더불어 폐와 간을 서로 비추며 한 마음으로 죽을 힘을 다하여 이 종교를 잡아서 마군에게 포섭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

… 밖으로부터 얻은 것은 전후에 어찌 한계가 있으리요. 또한 눈을 감고 생각해 보면 큰바다 가운데 온갖 강물을 받아 들이고 청탁이 모두 돌아가는데 모두 본래 이름을 잃어버리는데 필경에는 한 방울도 바다의 파도라는 이름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그 그릇이 크기 때문이라 화상의 법그릇이 대해보다 훨씬 더 커서 하고자 하는 바가 불가능이 없고 하고자 하는 일들이 참되지 않음이 없어서 이렇게 말한 위의 이야기들의 맥락은 내가 화상의 분상에 공연히 마디와 목차를 정한 것 뿐이지 나의 이러한 졸필로 감희 옳고 그름을 분간한 것은 아니니 특히 한번 웃어버리십시오.

이 일을 두어두고 이 몸은 조만간에 껍질을 벗어버릴 날이 올 것인즉 부음이 들리거든 곧 왕림해주셔서 열 소경에 한 막대처럼 이 외로운 고혼을 쓰다듬어서 문득 서방정토로 돌아가는 바른 길을 얻을 수 있도록 손을 들어 바라나이다.”

 

 

행장 /

 환월스님 은사로 출가

 선암사에서 후학 양성

1852년 1월 3일 경남 웅천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金氏). 석옹(石翁)이라는 호도 사용했다. 모친은 구씨(具氏)였다.

17세에 구례 연곡사에서 환월(幻月)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사미계는 해룡(海龍)스님에게, 비구계는 화산(華山)스님에게 받았다. 순천 선암사 대승강당(大乘講堂)에서 경붕(景鵬)스님에게 교학을 배웠으며 30세 되던 해에 강석(講席)을 승계했다.

그후 후학 양성에 전력을 다해 근세 대강백(大講伯)으로 명성을 떨쳤다. 스님의 강의를 듣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학승들이 선암사 대승암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경운스님은 순천에 포교당을 건립한데 이어, 1910년에는 경성에 중앙포교당이 설립되자 교화사업에 뛰어 들었다. 세속으로 들어가 중생들을 제도하는 입전수수(入廛垂手)의 삶을 몸소 보였다.

1911년 1월15일 만해.석전스님 등이 일제에 맞서 조선불교임제종(朝鮮佛敎臨濟宗)을 만들 때 임시관장으로 추대될 만큼 존경을 받았다. 당시 임제종은 순청 송광사에서 총회를 열고 임시 종무소를 설치했다.

스님은 1917년 조선불교선교양종교무원(朝鮮佛敎禪敎兩宗敎務院) 창립 당시 교정(敎正)으로 추대 됐다. 이같은 사실들은 스님이 일제강점기 조선불교의 정신적 중심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경운스님은 말년에 “병들고 늙어지면 아무 소용이 없는 물건이 되니, 젊어서 공부하여 중생을 건지라”는 내용의 글을 남겼다.

평생 후학을 기르는데 헌신하던 경운스님은 1936년 11월11일 오전 11시 순천 선암사 대승암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85세, 법랍 68세.

 

[불교신문 2435호/ 6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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