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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팔공산 동화사 마애여래좌상 염불암 마애보살좌상

 

팔공산 동화사 마애여래좌상 염불암 마애보살좌상

팔공산 동봉에서 내려오는 길, 산 중턱 염불암 마당의 큰 바위에 새겨진 여래좌상과 보살좌상 앞에서 예를 갖추고 찬 물 한 잔을 들이켰건만 더위는 좀체 가시지 않았다. 부처님을 찾아 종일 땡볕을 걸은 때문인가. 나는 비록 마음속이지만 암자 마당에 나무그늘 하나 변변치 않다며 투덜거리는 철부지 순례자가 되고 말았다. 더구나 동행한 지인은 바위너설을 걷느라 다리마저 다쳐 절룩이고 있으니 곁에서 바라보는 마음 또한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어쩌랴. 한 번 떠난 길은 끝이 없는 법이고 순례란 오직 마음에 있으므로 그와 같이 했다는 말 외에는 더 이상 설명할 무엇이 없는 것이기도 하지 않은가.

 

“저 끝 없는 허공에 부처님이 계시네”

 

   나라 안 으뜸가는 약사여래도량 ‘팔공산’

   삼성암터 비로봉 동봉 등 ‘약사불’ 산재

 

염불암으로 부터 동화사로 내려오는 길은 순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비단 포장이 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울창한 숲은 물론 곁을 따라 흐르는 계류가 만들어 내는 청신함에 마음이 절로 젖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산의 굽이를 거스르지 않은 길의 흐름이 억지스럽지 않았으니 걸음마저 편안했던 것이다.

얼마쯤이나 걸었을까. 비로소 마음은 평정을 되찾고 생각이 모아졌다. 그 생각의 끝은 어제부터 오늘까지 삼성암터의 마애약사여래입상 그리고 비로봉의 마애약사여래좌상과 동봉의 석조약사여래입상을 두루 친견했으니 팔공산은 약사여래의 도량인가 하는 것에 머물렀다.

더구나 갓바위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관봉석조여래좌상까지도 약사여래라고 믿는 이들이 있고 보면 팔공산은 나라 안에서 으뜸가는 약사여래 도량인 것만은 분명하지 싶었다.

사진설명 : 동화사 입구 마애여래좌상이다. 여느 곳과는 달리 허공에 계신 부처님을 구름이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앉은 모습 또한 결가부좌가 아니라 오른발을 연화좌 위에 걸쳐 놓았다. 이는 마애불에서 그 유례를 찾기가 쉽지 않다.

강원도 오대산의 상원사에 문수보살이 나투신 것과 같이 나라 안에 약사여래가 나투신 곳이 있다. 이제 겨우 왕래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한 개성의 비슬산(琵瑟山) 불은사(佛恩寺)가 그곳이다. 고려 광종은 매일 아침 왕궁에서 부처님에게 재를 올리며 스님들에게 공양을 베풀었는데 날마다 의식에 참가하는 스님들의 수가 정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들 중 한 명이 불참하여 그 수가 모자라게 되었다. 부랴부랴 거리로 나선 스님들은 행색이 초라한 스님이 지나가자 다짜고짜 데려와 말석에 앉히고는 “마지막 비구는 아예 왕궁에서 올리는 공양에 참여하였다고 말하지 말라”며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행색이 초라한 스님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너도 친히 약사여래를 봤다고 말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는 홀연히 공중을 걸어 유암(留巖)의 우물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에 놀란 왕은 유암을 고쳐 절을 크게 짓고 이름을 고쳤으니 그곳이 곧 불은사였다. 그로부터 불은사는 약사도량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더구나 흥미로운 것은 고려 말, 원나라의 왕경(王京)에 머물면서 연성사(延聖寺) 주지를 맡았는가 하면 동시에 우리나라 밀양의 영원사(瑩原寺) 주지까지도 겸했던 삼장법사(三藏法師) 의선(義璇) 스님이 불은사에서 기도를 하고는 병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가정(稼亭) 이곡(1298~1351)이 쓴 〈고려국 천태 불은사 중흥기(高麗國天台佛恩寺重興記)〉에 따르면 의선이 말하기를 “전날 내가 연우 갑인년(1314년), 왕경에 있을 적에 병이 나서 약과 치료가 효험이 없는지라 이 절의 약사여래에게 기도하였더니, 그날 밤 꿈에 신이 영단(靈丹)을 주기에 그것을 먹고서 그 이튿날 병이 곧 나았으므로, 이어 죽도록 그 가르침을 받들 것을 맹세하기를 사람이 정성스럽지 못한 것이 근심이지, 정성스러우면 물건도 감동시킬 수 있거늘, 하물며 약사여래의 영험한 반응이야 어떻겠는가” 라며 20여 년이나 걸린 불은사 중창에 앞장섰다는 것이다.

어느덧 부도암을 에돌아 동화사 마당을 지나쳤다. 이윽고 다다른 곳은 절의 남쪽에 세워진 옛 일주문 앞이었다. 그토록 서둘러 절 마당을 지나온 까닭은 허공에 머무시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기 위함이었다. 불교미술에서 대개 주악천인(奏樂天人)이나 공양천인(供養天人)이 하늘을 나는 비천상(飛天像)으로 표현되는 경우들이 많지만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부처님은 보기 드문 것이려니 마음이 급했던 것이다. 경주 남산 신선대의 보살좌상 또한 구름 위에 앉아 계시기는 하지만 부처님이 구름 위에 앉아계신 것은 드물며 더구나 마애불에서는 그 예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기에 마음이 들뜬 것이리라.

일주문 기둥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자 입은 절로 벌어졌다. 그리고 “저 끝없는 허공에 부처님이 계시네(無盡虛空有佛存)”라는 시 구절이 나도 모르게 흘러 나왔다. 과연 부처님은 반공(半空)에 떠 있는 것 마냥 바위의 높은 곳에 새겨져 있었다. 아무리 숭엄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고 높은 곳을 택했다고는 하지만 그 높이가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 정도였다. 전체높이가 5m는 족히 됨직한 바위벽의 윗부분을 택해 부처님을 조성했다는 것은 존엄한 분을 위한 예경(禮敬)의 마음을 넘어 하늘, 곧 허공에 떠 있는 것을 표현한 것이리라. 더구나 탁월한 것은 부처님 앉으신 연화좌 아래를 구름이 떠받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어찌 눈앞의 부처님이 계신 곳이 허공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마애불의 생동감은 지나치다 못해 구름은 금세라도 너울거리며 바람에 날릴 것만 같았고 부처님은 당장이라도 성큼성큼 바위 밖으로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 앞에서 환희로움을 느끼는 것은 그토록 힘찬 역동성이나 사실적인 생동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이 앞에서 다라수(多羅樹)잎에 새겨놓은 결집경전(結集經典)인 패엽경(貝葉經)을 대했을 때의 감정처럼 원초적인 아름다움을 느꼈을 뿐이다. 구름 노닐고 바람 지나가는 하늘은 공(空)이며 다라수 잎 또한 경을 새기기 전까지는 허공과 마찬가지로 비어 있지 않았던가.

사진설명 : 허공이라는 표현 때문인지 바위벽 높은 곳에 부처님을 조성했다.

높이 5m 되는 바위 윗부분에 불상 조성

‘존엄한 분’ 향한 예경의 마음 담고 있어

텅 빈 나뭇잎에 부처님의 말씀을 모아서 새긴 것과 자연 암벽에 부처님의 모습을 새긴 것이 무엇이 다를까. 법신은 이미 허공이며 법계는 여래이니 허공이란 곧 근원이 아니던가. 한 획 한 획 써 나가는 사경이나 한 점 한 점 송곳 같은 정 끝으로 바위를 쪼고 저며서 여래의 모습을 이루는 것은 허공에 머무는 부처님에게 다다를 수 있는 사다리를 만드는 일과 같을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우리들에게로 오시며 사부대중들 또한 머리 숙이고 몸 낮춘 채 그 사다리를 통해 부처님에게로 향하는 것이리라.

얼마간 적요의 시간이 흘렀다. 곁으로 계류가 흘렀건만 그 물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한낮을 불같이 달구던 태양도 빛을 잃어갈 즈음 겨우 환희로운 장면에 들뜬 마음을 추슬렀는가 싶었는데 아! 저것은 또 무엇인가. 눈길이 부처님의 발에 머물고 말았다. 의당 그러려니 하고 무심히 지나쳤던 것은 나의 잘못된 습(習) 이었다. 어디서나 그랬듯이 수인이 항마촉지인이며 앉아계셨으니 발은 당연히 결가부좌이려니 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부처님은 오른발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왼발은 군의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유희좌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눈에 띌 듯 말듯하게 말이다.  

자칫하면 놓칠 뻔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유희좌라고 하기에도 머뭇거려지는 특이한 모습이었으니 눈길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다시 부분에서 전체를 톺아보기 바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만나고 싶었다. 이 부처님을 조성하려 발원한 분과 또 조각을 한 석공을 말이다. 그들이 체득하여 향유한 법미(法味)는 도대체 어떤 것이었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을 남겨 놓고 떠나갔단 말인가. 그들을 만날 수만 있다면 이제 곧 피어날 하얀 담복화 한 송이 그들에게 공양하리라. 그 꽃 한 송이 있으면 온 숲이 그 향기로 뒤덮인다고 했으니 그들이 곧 담복화 그 자체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그들의 정성스러운 마음은 분명 담복화 향기로 응결 되었으리,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천지간에 미약한 크기로 새겨진 부처님이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히려 천지간을 법향에 젖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비록 부처님의 존재가 이미 클지라도 그들이 아니었다면 전해지지 않았으리라. 그들의 마음과 손끝에서 부처님은 새롭게 장엄되고 면면히 불법은 이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느덧 초여름의 막바지 햇살이 지나간 자리에 그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낮 동안 끓는 쇳물 같이 열기를 내뿜으며 쏟아지던 햇살이 수그러들자 부처님은 적조(寂照)한 모습으로 내 앞에 다시 나투셨다. 그렇게 그는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사부대중들을 맞이하였으리라. 그 아름다운 모습 우러르며 세 번 절하고 그만 돌아섰다. 몸을 일으켜 구태여 국도를 통해 설렁설렁 공부방으로 돌아오는데 섬광처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사라쌍수하 곽시쌍부(沙羅雙樹下 槨示雙趺)였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뒤늦게 찾아 온 가섭존자가 관을 세 바퀴 돌고 세 번 엎드려 절하자 부처님은 두 발을 관 밖으로 내놓지 않았던가. 동화사의 마애부처님은 혹 대중들에게 이심전심의 전법을 말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아직 대중들이 미약하여 한 발만을 내놓으셨을 뿐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불미에 젖어 비록 서툰 걸음이지만 부처님의 삶을 따를 때 나머지 한 발마저 내 놓으실 것만 같았던 것이다. 나만의 허튼 상상일지라도 개의치 않으련다. 세상에 부처님의 말씀이 이기는 것 하나 없지만 불법(佛法)을 이기는 것 또한 하나도 없으니 말이다.

이지누 기록문학가

 

 

■ 마애여래좌상 특징

       “구름이 부처님 받치고 있어”

 

팔공산은 노천박물관이라 불리는 경주 남산에 이어 전남 강진의 월출산과 함께 단일 지역에 가장 많은 마애불이 조성된 지역이다.

신무동과 삼성암지 그리고 비로봉과 동봉 또 이번 순례에 찾아 나선 염불암과 동화사의 그것에 더해 신무동 근처인 용수동에 새기다 만 마애불두상이 있으니 모두 8구의 마애불이 산중에 있는 셈이다.

그중 염불암에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2구의 불보살이 새겨져있다. 암자 마당 오른쪽 뒤에 있는 삼각형의 바위 서쪽 면에 아미타여래로 알려진 여래좌상 그리고 남쪽 면에는 관음보살로 알려진 보살상이 조성되어 있다. 2구를 합해 유형문화재 제 14호로 지정되었으며 마당 가운데에는 유형문화재 제 19호인 청석탑(靑石塔)이 있다.

여래좌상은 높이가 4m에 이르며 보살좌상은 4.5m에 달하는데 보살좌상의 법의가 눈길을 끈다. 대개의 보살상들은 천의와 군의를 몸에 걸치는데 반해 이곳의 보살상은 법의를 우견편단으로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설명 : 염불암의 마애보살좌상이다. 우견편단의 법의가 이채롭다.

보물 제 243호로 지정 된 동화사 입구의 마애여래좌상은 나라 안에서 드물게 보는 마애불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종인 성덕대왕신종이나 상원사의 동종 종복(鐘腹)에 새겨진 주악천인상이나 공양천인상을 장엄하고 있는 것과 같은 구름이 부처님을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발의 자세 또한 결가부좌가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유희좌와도 달라 그 유례를 찾기가 쉽지 않다.

또한 부처님이 앉아계시는 연화좌 아래로 구름에 이르기까지 대좌의 중대와 하대가 표현 된 것도 마애불에서는 드문 일이다.

불상의 높이는 1m남짓하며 조각은 섬세하며 전체적으로 화려하며 장식적인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는 통일신라하대에 조성된 것으로 본다.  이지누 기록문학가

 

 

■ 가는 길 

팔공산 동봉과 비로봉의 부처님을 친견했다면 산 아래로 내려오는 길을 염불암으로 잡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면 절로 염불암과 동화사를 들르게 된다. 하루면 동봉과 비로봉 그리고 염불암과 동화사의 마애불을 모두 친견할 수 있는 아름다운 순례길이 될 것이다. 동화사에서 시작했다면 염불암을 거쳐 상봉의 두 분 부처님을 친견하고 케이블카를 타고 산 아래로 내려오는 것도 방법이다.

 

[불교신문 2340호/ 7월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