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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유적과사찰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사찰] - 다시 보는 경주 불국사

인도 영취산과 토함산의 만남…부처님의 나라

2600여년 전 인도 마가다국
왕사성 영취산을 드러내(吐)
신라인의 마음에 품어서(含)
‘부처님 나라’ 만든 곳(佛國)

석가모니불과 다보여래 만남
중생과 부처님의 만남 ‘상징’
‘백련’ 가르침 흐르는 야단법석
불국사는 인간은 누구나 불성(佛性)을 가진 존재로 노력에 의하여 성불한다는 법화사상과 현상계는 개별적인 모습과 서로 융합한다는 모습의 화엄사상에 의해 조성됐다. 불국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청운·백운교는 가파른 33계단이다. 왜 33계단일까?

 

경주 불국사는 부처님께서 가지가지 비유와 방편으로 “교만한 자는 교만을 멈추게 하였고, 제도하지 못한 이를 제도하며, 편안하지 못한 이를 편안케 한” <묘법연화경>의 설법장소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조성됐다. 2600여 년 전 인도 마가다국 왕사성(라지기르)에 있는 영취산(기사굴산)을 드러내(吐) 신라인의 마음속에 품어서(含) 부처님의 나라(佛國)를 만든 곳이 바로 토함산(吐含山) 불국사(佛國寺)이다.


그런 까닭에 경주 토함산(745m)과 인도 영취산은 산의 높이나, 돌이 많다거나, 왕궁으로부터 15여리 떨어진 것이나, 서쪽에서 동쪽으로 산을 오르는 방향도 비슷하다. 부처님께서 8년간 <법화경>을 설한 기사굴산의 암대(해발 224m)와 불국사 석가탑·다보탑(해발 235m)의 고도 또한 비슷하다. 삼장법사 현장스님은 <대당서역기>에서 “궁성(왕사성) 동북으로 14∼15리를 가면 기사굴산이 나온다. 산의 남쪽 기슭에 탑이 있는데 예전에 여래께서 이곳에서 <법화경>을 설하셨다”는 기록으로 인도 기사굴산과 경주 불국사는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느끼게 한다.

사진은 법화경에 나오는 설법장소로 알려진 인도의 영취산. 토함산 불국사 창건배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성지이다.

 

청운·백운교 왜 33계단일까?


불국사는 인간은 누구나 불성(佛性)을 가진 존재로 노력에 의하여 성불한다는 법화사상과 현상계는 개별적인 모습과 서로 융합하는 모습의 화엄사상에 의해 조성됐다. 불국사 청운·백운교는 가파른 33계단이다. 왜 33계단일까? <불설장아함경>에 중생세계는 “욕계 11종류(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6천), 색계 18종류, 무색계 4종류의 33중생세계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부처가 되려면 지옥에서부터 무색계까지의 33중생세계를 뛰어 넘어야 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청운·백운교는 중생이 수행을 통해 스스로 부처가 된다는 <법화경>의 자력신앙(自力信仰)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조선 중엽까지만 해도 불국사는 배를 타고 연못을 지나 청운·백운교를 건너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연못은 번뇌를 씻는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고, 다리는 <불설보살내습육바라밀경>에 “법의 다리(法橋)를 놓아 모두를 법문에 들어오게 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대방광불화엄경>에 “연못을 만들어 무지의 바다에서 법의 배를 타서 번뇌를 끊고, 구름다리를 만들어 애욕의 바다를 건넌다”는 구체적 표현이 불국사 연못과 청운·백운교이다.


그런데 서쪽 연화·칠보교는 동쪽 청운·백운교와는 다른 비대칭의 아름다운 공간연출로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획일적인 같음을 싫어해서 다름을 마음껏 발휘하면서도 공존의 질서를 존중하였다. 불국사는 다리 계단의 차이와 석축의 거친 자연미와 정제된 인공미의 조화를 표현하여 본래 둘이 아닌 법성게의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지만 다름을 인정하는 ‘격별성(隔別成)’을 이어서 화엄십찰의 교리적 장엄을 보여준다.

자하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석가탑(석가여래상주설법탑). ‘무영탑(無影塔, 그림자가 없는 탑)’으로도 불린다.

 

극락전으로 오르는 연화·칠보교는 <불설관무량수불경>에 나오는 극락세계를 관하는 사람과 극락세계의 16가지 모습, 아미타불의 모습 등 18계단이다. 계단이 짧은 것은 쉽게 극락으로 가는 타력신앙(他力信仰)을 나타내고 있다. 이 계단을 오르면 안양문과 극락전이 나온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삼보를 공경하며, 계율을 지켜 살생을 금하면 극락에 간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였다.


청운·백운교를 건너면 자하문(紫霞門)이 나온다. 자마금색(紫磨金色)의 부처님 광명이 서린 문이란 뜻으로 불국정토에 이르렀음을 말한다. 문을 들어서면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다. 먼저 서쪽에는 ‘석가여래상주설법탑’인 석가탑이 인도 영취산처럼 바위가 솟아오른 곳에 우뚝서있다. 탑을 둘러싼 8송이 연꽃은 <법화경> 청문(聽聞) 보살이 앉아 부처님을 에워싸고 <법화경>을 듣는 사실성을 더해주고 있다. 석가탑을 다른 말로 ‘무영탑(無影塔, 그림자가 없는 탑)’이라 한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틋한 그리움에서 비롯된 설화에서 무영탑이라 하였으나 이는 설화일 뿐 교리적인 해석은 아니다. 태양 자체엔 그림자가 없는 것처럼 부처님은 태양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림자가 없다는 의미이다. <법화경> ‘여래수량품’에서 말한 여래의 법신은 영원불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보탑. 부처님께서 영취산에서 동쪽을 향해 법화경을 설하시자 다보여래가 땅속에서 탑으로 솟아오른 모습이라고 한다.

 

동쪽의 다보탑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취산에서 동쪽을 향해 <법화경>을 설하시자 앞에 다보여래가 땅속에서 탑으로 솟아오른 모습이 다보탑(多寶塔)이다. <법화경> ‘견보탑품’에 “그때 부처님 앞에 칠보탑이 땅에서 솟아나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보물로 장식되었으며 5000개의 난간(그래서 다보탑에는 난간이 있다)과 천만의 방이 있으며, … 이때 보배탑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찬탄하길 ‘거룩하시고 거룩하시도다. 석가모니 세존이시여! 대중을 위해 <법화경> 설하시니, 세존께서 하시는 말씀은 모두 진실이니라’ 하였다.”


다보탑은 수많은 보배로 장엄된 탑이란 이름에 걸맞게 석가탑과는 완전히 다른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뽐낸다. 특히 다보탑이 공중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단 사방 4곳을 계단으로 표현했다. 부처님께서는 지상에서 뛰어 올라 이 계단을 통해 다보여래와 함께 하셨다.

 

또 다른 다보탑


불국사에 또 다른 다보탑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비로전 서편에 있는 세존사리탑이 바로 고려시대의 다보탑이다. 고려 초에 조성된 이 다보탑은 배가 부른 타원형으로 4면에는 각각의 감실을 만들었다. 감실 속에는 항마촉지인의 석가모니불과 설법인의 다보여래가 앉은 모습으로, 석가모니불 우측에는 범천이 긴 불자를 손가락에 낀 채 합장하고, 다보여래의 좌측에는 제석천이 오른손에 금강저를 들고 서 있다. 중대석의 신령스런 구름무늬는 탑이 허공가운데 솟아 있음을 표현했다. 이 세존사리탑은 1905년 일제 강점기 때 불법(不法) 반출되어 일본 도쿄(東京) 우에노공원에 옮겨졌다가 1933년에 다시 불국사로 반환됐다.

대웅전 삼존불과 가섭, 아난. 기사굴산처럼 불국사 대웅전에도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삼존불이 계신다.

 

<대지도론>에서 “기사굴산은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이 머무르는 곳”이라 했다. 기사굴산처럼 불국사 대웅전에도 과거·현재·미래의 삼존불이 계신다. 본존 석가모니불은 특이하게 항마촉지인이 아닌 설법인을 하셨다. 그 까닭은 불국사가 <법화경>의 ‘상주설법처’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삼존불은 조선 영조 45년(1769)에 조성하여 모셨는데 바라보아 좌측에는 제화갈라보살을, 중앙에는 석가모니불을, 우측에는 미륵보살을 배치해 불국사는 삼세의 부처님이 머무는 영원불멸한 공간임을 표현했다. 그 옆에는 젊은 아난과 늙은 가섭존자가 있어 영산회상을 느끼게 한다.


불국사는 신라, 고려, 조선,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도 영취산과 토함산의 만남, 중생과 부처의 만남, 석가모니불과 다보여래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무엇보다도 바른 백련(白蓮)과 같은 가르침을 펼친 부처님의 나라가 되었다.
 

[불교신문3658호/2021년3월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