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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만평비교[中斷]

정병(淨甁)

마음 속 번뇌 씻으려는 서원 상징


관세음.대세지보살 범천 등의 ‘삼매야형’

경주 석굴암 범천상 정병이 대표적 사례

팔상도 가운데 수하항마상에도 정병 등장

열대 청결용 물병서 유래…예술작품 승화



사진설명: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국보 제92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려.

정병은 이름 그대로 정화용(淨化用) 물을 담아 두는 병, 또는 의식 장소를 청정도량으로 조성키 위해 물을 뿌릴 때 사용하는 물병이다. 인도를 비롯한 남방 열대지방 사람들이 사용하는 kundika(쿤디카), 또는 kendi(캔디)에 기원을 두고 있다. 감로병 또는 보병(寶甁) 등으로 불리는 정병은 향로와 더불어 공양구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힌두교에서의 정병은 브라만과 시바에 대한 경건한 마음의 상징으로 간주되며, 불교에서는 범천, 천수관음보살, 수월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의 지물 혹은 도상(圖像)적 특징으로 나타난다.

쿤디카 혹은 캔디는 원래 열대지방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던 물병으로 와기(瓦器) 또는 자기(磁器)로 만들어졌다. 입수구와 출수구가 분리되어 있는 이 병의 당초 제작 목적은 더운 낮에도 물을 시원한 상태로 보관하려는 데 있다. 인도네시아 서(西) 자바섬 사람들은 결혼식에서 달걀을 깨뜨리는 의례 다음으로 쿤디카의 물로 신랑 발을 씻어주는 청결 의식을 행한다고 하며, 발리에서는 지금도 두통치료를 위해 코 속으로 물을 붓기 위한 약병으로도 쓰인다고 한다.

불교적 의미의 정병에 관한 기록은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 〈대당서역기〉 등에서 발견된다. 〈남해기귀내법전〉은 당나라 의정(義淨, A.D.635∼713) 스님이 인도를 비롯해 동남아 여러 나라를 돌아본 뒤에 시리불서국(尸利佛逝國), 즉 오늘날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지역에 머물 때 순례했던 나라들에 대한 견문 내용을 정리해 놓은 것으로, ‘수유이병(水有二甁)’ 조(條)에 정병에 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진설명: 청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국보 제66호). 간송미술관 소장. 고려.

“대개 물은 정(淨)과 촉(觸)으로 나누어 사용하며, 따라서 병은 두 개다. 정병은 와기(瓦器)나 자기(瓷器)로 만들고, 촉병은 동과 철을 함께 사용하기도 한다. 정병은 수시 음용(飮用)으로 사용하며, 촉병은 편리한 대로 쓰인다. 정병은 깨끗한 장소에 보관하지만 촉병은 손에 잡기 쉬운 장소에 놓아두고 함부로 사용한다. 정병의 물은 아무 때나 마셔도 되지만 촉병의 물은 그렇지 않다.”

정병의 모양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병 꼭대기에 두 손가락 길이의 뾰쪽한 대(尖臺)가 있다. 그 속에 구리 젓가락 굵기의 작은 구멍이 나있는데, 이를 통해 물을 마실 수 있다. 옆쪽에 별도의 둥근 구멍이 나있으며, 크기는 대략 동전만하다. 물을 채울 때 이곳을 이용하며, 약 2∼3되 정도의 물을 넣을 수 있다. 벌레나 먼지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뚜껑을 덮어두거나 대나무 또는 나뭇잎 등으로 틀어막는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사용법에 대해서는 “물을 채울 때는 반드시 병 속의 먼지나 더러운 것을 씻어낸 다음에 새 물을 채워야 한다. 병에 남은 물을 버릴 때는 옆 주둥이 쪽을 기울이면 물이 흘러나와 흩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당나라 현장스님(602∼664)은 인도 방문길에 갠지스 강 남쪽의 우렌(Uren)산 불적을 찾아갔을 때 부처님이 정병을 놓아두었던 흔적을 보았다는 내용이 〈대당서역기〉에 기록되어 있다. 내용인 즉, 정병 자국의 깊이가 1촌 남짓이고 여덟 개의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고 했으며, 권10의 각주(脚註)에서는, 보통 사람들이 군지(軍持)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것이고 군치가(稚迦)라고 해야 옳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밀교에서는 칼, 창, 약합(藥盒), 석장 등 세속적인 기물이 종교적으로 승화되어 불.보살이나 신중의 삼매야형(三昧耶形)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삼매야형이란 부처와 보살의 존격(尊格)이나 내적 깨달음의 내용, 서원, 공덕 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범천 등의 삼매야형이 바로 정병이다.

범천의 삼매야형을 나타난 사례로 대표적인 것은 경주 석굴암 범천상의 정병이다. 범천은 범마(梵摩), 범람마(梵覽摩)라고도 하며, 원래는 힌두교 신이었으나 부처님 설법을 듣고 불교에 귀의한 신중이다. 경전에서는 범천이 거울, 연꽃, 정병 등을 들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있어서는 석굴암 범천상처럼 정병을 든 모습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석굴암 범천상은 왼손에 정병을 들고 있는데, 정병 어깨 부분에 입수(入水) 꼭지가 붙어 있는 것이 뚜렷이 보인다.

보살이 정병을 들고 있는 유례를 살펴보면, 석굴암 본존불 뒤 벽의 십일면관음보살, 무량사 소조아미타삼존불상의 협시보살인 대세지보살상의 보관(寶冠)에 정병이 나타나 있고, 경주 배동 삼존석불입상의 좌협시, 경주 선도산 마애삼존불상 좌협시 관음보살, 함안 대산리 석불의 우협시보살, 그리고 국립경주박물관 마당의 경주 낭산 석조관음보살입상 등에서도 정병을 왼손에 들고 있는 보살의 삼매야형을 볼 수 있다.

사진설명: 석굴암 범천상(국보 제24호)의 정병. 통일신라

그림의 경우에는, 고려의 혜허가 그린 수월관음도(일본 센소사 소장)를 비롯한 수월관음도 계통의 불화에서 보살이 정병을 들고 있거나, 버드나무 가지가 꽂혀있는 정병이 보살 앞에 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부처님 일생을 그린 팔상도 중의 하나인 수하항마상에도 정병이 등장하고 있다. 부처님이 정각(正覺)에 드는 것을 방해하려는 마왕 파순과 그의 군대가 석존 앞에 놓인 물병을 밧줄로 감아 끌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 물병이 바로 정병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정병 유물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긴 목을 가진 비교적 단순한 병의 형태로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몸통의 한쪽 어깨에 꼬부라진 깔때기 모양의 입수구(入水口)가 달려 있고, 병의 위쪽에 긴 목과 대롱을 닮은 첨대(尖臺)와 환대(環臺 : 첨대와 목 사이의 뚜껑처럼 생긴 마디)가 연결되어 있는 구조로 된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보통 병의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어깨 부분이 넓고 풍만하면서 주둥이가 넓게 벌어져 있는 점이 일반적인 병과 다르다. 첨대와 입수구를 갖춘 정병은 우리나라 전통 공예 미술의 높은 수준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고려시대 제작된 청동제 정병 중에는 뛰어난 금속공예기술과 조형미를 자랑하는 걸작품이 많다.
사진설명: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의 포류수금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청동은입사포류수금문정병(국보 제92호)이 대표적인 예이다, 높이가 37.5㎝ 정도로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이 정병은 첨대, 긴 목, 몸체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깨에 뚜껑 달린 작은 깔때기 모양의 입수구가 달려 있다. 특히 첨대와 목을 연결하는 환대 부분과 입수구 뚜껑은 은으로 만들어져 있다. 특히 환대에는 은판(銀板)을 투각하는 높은 금속 세공 기술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첨대 아래쪽 부분에는 풀잎무늬가, 목에는 구름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몸체에는 주문양인 포류수금문이 몸체를 돌아가며 대칭적인 구도로 시문되어 있다. 물가에 낚시꾼이 앉아 있고, 수면에는 배와 오리가 한가로이 떠돌고, 하늘에는 기러기 떼가 허공을 자유롭게 날고 있는 모습이 정겹다.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자연계 모습을 담은 이 정병은 형태미, 문양표현의 격조, 은입사기술법과 금속투각기술의 수준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또 하나 주목되는 정병은 간송미술관 소장의 청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국보 제66호)이다. 고려 전기 청자 정병으로 높이 37㎝ 정도의 크기인 이 작품은 청아한 담녹색 계통의 비취색 유약에 백토(白土) 상감기법으로 버드나무와 갈대, 연꽃, 원앙새 한 쌍을 회화적 기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유약이나 바탕흙이 매우 정선되어 있고, 청아한 비취색 유약이 세련미를 보여주는 몸에 상감무늬를 곁들여 장식효과를 한층 더 높인 이 청자 정병은 초기 상감청자 정병 중에서는 가장 정제되고 세련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허 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불교신문 2207호/ 3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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