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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43.고봉태수

 

43.고봉태수


평생 무(無)의 진면목을 보이며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살았던 고봉태수(高峰泰秀, 1900~1968)스님. 그는 세상에 일체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했다. 선(禪)과 교(敎)를 넘나들며 강주를 제외한 일체 소임을 맡지 않고 오로지 도제양성에 혼신을 다했던 고봉스님의 삶을 서울 관음사와 김천 청암사에 있는 비문과 종하스님(전 중앙종회 의장)의 회고를 통해 재조명 했다.

  


 
“佛法을 보아라, 부처님 가르침은 禪이다” 
  

   
  선교 넘나들며 후학 양성에 전념

  파격적인 일상…무애자재 ‘경지’
 
  
○…“이제부터 졸업이 아니라 학문탐구와 인간의 진면목을 터득하는 길목의 출발점을 알았을 뿐 이다.” 1967년 12월 10일자 <불교신문>에 실려 있는 고봉스님 육성이다. 김천 청암사 강원 1기 제자들을 졸업시키면서 한 당부이다. 교학 연찬을 마친 제자들에게 강조한 “인간의 진면목을 터득하는 길목의 출발점을 알았을 뿐”이라는 가르침은 출가 사문의 자세와 마음가짐을 알려준 금과옥조(金科玉條)이다.

○…그는 ‘호랑이’ 스님 이었다. 처음 친견하는 이들은 ‘무뚝뚝하고 무서운 스님의 기운’에 눌려 입조차 떼기 어려웠다. 상좌들에게는 더욱 엄격했다. 제자 입장에서는 ‘까닭 없이’ 회초리를 맞는 일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매몰차게 뺨을 때리는 스승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단다. 이때 고봉스님은 단 한마디만 했다. “이 뭣고.” 망상 안피우고 제대로 화두 참구를 하는지 점검하는 시간이었다.

제자 우룡스님도 “40살이 넘어서까지 은사 스님께 주장자로 얻어 맞았다”고 회고한바 있다. 스님이 입적한지 4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제자들은 그때 그 시절 은사의 손길이 그립다.

<사진> 자유자재한 삶으로 중생들을 제도했던 고봉스님 진영. 서울 관음사에 모셔져 있다.

‘수행자의 길’을 흔들림 없이 갈 수 있도록 경책하고 훈육(訓育)했던 스승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고봉스님은 “승려 보고는 승려 생활을 못한다. 부처님 법을 봐라.… 개가 전봇대에 오줌 싸듯 집착하지 말라”며 제자들을 지도했다.

○…세상에 자취를 남기지 않으려 했던 고봉스님의 행적이 담긴 한통의 편지가 있다. 그것은 근현대 선지식 경봉(鏡峰,1892~1982)과 주고받은 서찰이다. 이 편지에서 고봉스님은 “…전날 별 재주도 없는 저에게 운을 띄운 것을 생각하면 모몰염치(冒沒廉恥, 염치없는 줄 알면서도 이를 무릅쓰고 함)의 부끄러운 생각에 땀이 등에서 흐르니 다시 생각을 고치심이 어떨까요. 산은 첩첩하고 구름은 중중(重重)한데 어느 때 다시 상면을 기약하리까”라는 겸손한 내용을 담고 있다. 경봉스님 또한 화답을 했다. “헤어진 뒤에 마음이 항상 편치 않던 터에 다행히 편지를 받아보니 감회가 무량하구려. 근일 강원에 주석하며 교화하신다니 멀리서 위로하며 기뻐하고 축하하오.” 이 서신에서 경봉스님은 “다시 영축산에 와서 함께 발우를 씻는 생애를 보내기를 천만번 빕니다”라며 고봉스님에게 ‘각별한 마음’을 보였다.

○…사형(師兄)인 동산(東山,1890 ~1965)스님도 고봉스님의 ‘깊이’를 인정했다. 동산스님은 “사제인 고봉은 보통 강사와는 다르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봉스님과 동산스님은 수행과 공부 방법을 놓고 법담(法談)을 나눌 만큼 격의 없이 지냈다. 직지사 조실 관응(觀應, 1910~2004)스님도 “나도 강사이지만 고봉스님은 강사로서 배울 점이 많은 분이다”라고 존경했다.

○…고봉스님의 삶은 누구보다 자유로웠다. 세속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고, 출가 후에는 교학과 참선 수행을 겸비했지만 스님의 일상은 범부의 눈으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파격적(破格的)’이었다. 늘 곡차(穀茶)가 떨어질 줄 몰랐고, 제자들과 바둑을 즐기는 일이 많았다. 학인들에게 강의 할 때도, 손님을 맞이할 때도 곡차를 곁에 두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출타할 일이 있으면 스님의 시봉은 무엇보다 먼저 곡차를 챙겨 걸망에 넣어야 했다. 후학들이 붙여준 별명이 ‘주고봉(酒高峰)’이었을 정도다. 그렇다고 곡차와 바둑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파격’을 통한 일상은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수행자의 또 다른 ‘창조(創造)’ 였으며, 그 어느 것에도 갇히지 않은 자유자재의 경지를 보여 주었을 따름이다.

○…스님은 평생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시간이 일정했다.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화두를 챙기고 경학을 찬연(鑽硏)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대강백이었지만 은사 용성스님에게 받은 ‘심마(甚)’라는 화두를 놓는 일이 없었다. 제자 종하스님은 “경전을 강의할 때도 선지(禪旨)를 강조하셨으며, 사교입선(捨敎入禪, 일정한 교학연찬을 마치고 선 수행에 들어가는 것)을 말씀하셨다”고 회고했다. 당시 말학(末學)들에게 고봉스님은 “부처님 가르침이 모두 선(禪)으로, 선지가 없으면 문리(文理)가 없다. 글자 하나하나 선지를 최고로 표현한 것이다. … 문(文, 경학)을 깨치면 반드시 선방에 가라”고 역설했다.

○…세상에 자국을 남기지 않으려 했던 스님은 그런 이유에선지 상좌를 많이 두지 않았다. 그 어느 것에도 걸림 없이 살려는 뜻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렵게 문하에 둔 몇 안 되는 제자들은 한국불교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당대 강백인 우룡스님(경주 함월사 조실)과 율사인 고산스님(조계종 전계대화상), 그리고 중앙종회 의장을 역임한 종하스님이 고봉스님 제자이다.

<사진> 1964년 김천 청암사에 머물 무렵의 고봉스님(앞줄 가운데). 셋째줄에 고산스님과 종하스님 모습도 보인다. 출처=‘지리산의 무쇠소’

○…정화불사가 한창이던 시절 스님은 손수 나무로 장기(杖技)를 많이 만들었다. 주위에서 까닭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요즘, 시류를 치종(從)하는 사람들이 그 지조를 굽혀 능히 자립하지 못한지라. 이 장기로 부립(扶立, 도와 세움)하려고 만든다.”

○…고봉스님은 당대의 대강백이었음에도 단 한권의 저서도 남기지 않았다. 한시만 10여수 전해올 뿐이다. 경전 해설서 등의 책을 발간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하는 이가 있으면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야, 이눔아 팔만대장경이 모두 부처님 가르침인데, 무엇 때문에 해석을 붙이느냐. 부처님 말씀은 손을 대면 안 된다.”

○…사바세계와 인연을 놓을 때도 무애의 경지를 보여 주었다. 평소 바둑을 좋아했던 스님은 1968년 1월18일(양), 젊은 학인과 바둑 한판을 두었다. 어느덧 점심공양 시간이 되었고, 학인이 공양을 준비해온 사이에 조용히 원적에 들었다. 마치 자유롭게 하늘을 날던 새가 나무 가지에 앉아 침묵 속에 인연의 끈을 놓고 자연으로 돌아가듯이….



오도송 /


一杖穽雲歸故里(일장정운귀고리)

四顧能無識我人(사고능무식아인)

夫峰山下伸脚臥(부봉산하신각와)

無生一曲太平春(무생일곡태평춘)


지팡이 하나로 구름을 뚫고 고향에 돌아가니

사방을 돌아보아도 나를 아는 사람은 없구나

부봉산 아래에 다리를 펴고 누워

무상의 삶을 노래 한 소절에 태평가로 부른다

 


행 장 /

용성ㆍ석전스님 제자

평생 소임 맡지 않아


고봉스님은 20세기가 시작되던 1900년 8월11일 황해도 신천군 낙도면 도습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강영곤(姜永坤) 선생과 모친 덕수(德水) 이씨(李氏) 사이에서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속명은 강재욱(姜在旭), 본관은 진주(晋州). 부친이 유교 규범을 준수하고 항일의 뜻을 갖고 있어 신식 교육을 받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재욱은 10여세에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마치고, 백일장에서 장원을 할 만큼 재능을 보였다.

선친의 뜻에 따라 혼례를 올렸지만, 4년 뒤 부인이 난산(難産)으로 세상을 떠나 인생무상을 느끼고 집을 나왔다. 경성.원산.평양 등을 오가며 포목상에 종사하다, 25세 되던 해에 옛 친구 금초(錦超)스님을 만나 선의 이치를 들은 후 깨달은 바가 생겼다. 이후 용성진종(龍城震鐘)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대소승계를 구족하고 수행 정진했다.

도봉산 망월사에 개설된 만일선회(萬日禪會)에 동참해 아침에는 죽을 먹고 오후에는 불식(不食)하며 묵언과 면벽수도로 일관했다. 이후 천성산 내원사에서 용성스님, 직지사 천불선원에서 제산(霽山)스님, 덕숭산 정혜사 능인선원에서 만공(滿空)스님 등의 지도를 받았으며, 금강산 마하연과 해인사 퇴설선원에서도 정진했다.

선안(禪眼)이 열린 스님은 선교(禪敎)가 둘이 아님을 인식하고, 부처님 가르침이 담긴 교학을 연찬하는데 힘을 쏟았다. 합천 해인사 고경(古鏡)스님 문하에서 대장경을 열람했으며, 이후 법주사 석상(石霜)스님, 범어사 구해(九海)스님, 사불산 환경(幻鏡)스님 등 강백의 지도를 받았다. 그리고 안변 석왕사 강원과 금강산 유점사 강원 등에서 2년 8개월간 경전을 익혔다. 경성 개운사에서 석전(石顚)스님에게 선리경안(禪理經眼)을 인정 받고 법맥을 계승했다. 이때 받은 법호가 고봉(高峯)이다. 그 뒤로 은해사.해인사.대원사.쌍계사.영각사.다솔사 등에서 55세까지 강의를 했고, 이후 다시 운수행각에 오르는 등 선과 교의 균형을 갖췄다. 이에 앞서 용성스님이 선농일치(禪農一致)를 구현하기 위해 설립한 화과원(花果院)에서 농사를 지으며 정진하기도 했다.

스님은 평생 사찰 주지 등 행정과 관련된 소임은 일체 맡지 않고, 오직 도제 양성에 매진하다 1968년 1월18일(양) 김천 청암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68세, 법납 45세. 수법은제자(受法恩弟子)로 우룡종한(雨龍鐘漢).고산혜원(山慧元).진산종하(晋山鐘夏) 스님이 있으며, 김천 청암사와 서울 관음사에 비가 모셔져 있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불교신문 2491호/ 1월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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