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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리와법문

[선지식] 석우보화

 

석우보화

고결한 성품과 자상한 언어로 대중을 인도했던 석우보화(石友普化, 1875~1958)스님.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스님은 비록 불혹(不惑)이 가까운 나이에 출가했지만 수행 정진은 그 누구보다 치열했다. 수행자의 본분사(本分事)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던 석우스님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올해 입적 50주기를 맞이한 스님의 수행을 되돌아 보았다.

 

 

“진정한 도는 부처님 문중에 있구나”

  조계종 출범 당시 종정으로 추대

  동화사 금당선원 개설해 수좌 ‘지도’

 

사진설명 : 인자한 미소로 대중을 지도했던 석우스님. 만장일치로 초대 종정에 추대될 만큼 후학들이 사표로 삼고자 했던 스님이다.


수심결 첫 대목 읽고 출가

○…동래 범어사에 머물던 스님은 고려 말 보조국사가 지은 ‘수심결(修心訣)’ 첫 대목을 읽고 출가를 결심했다. “삼계를 윤회하는 고통은 마치 불난 집과 같은데, 어찌 그대로 참고 머물며 오랜 고통을 받으려 하는가. 윤회를 벗어나려면 부처님을 찾는 길밖에 없다. 만약 부처님을 찾으려면 이 마음이 곧 부처님이니…” 이 구절을 읽고 스님은 “불각낙루(不覺落淚)하고 ‘대도(大道)는 실로 이 문중(門中)에 있구나’라며 출가의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깨달음을 만나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커다란 도(진정한 도)는 실로 부처님 문중에 있구나’라는 마음으로 출가를 다짐했다.


효심 깊은 ‘금강산 양반스님’

○…불연(佛緣)을 맺어준 은사 연담스님에 대한 효심이 극진했다. 연로하여 거동이 불편한 은사스님을 업고 장안사를 출발해 영원암, 표훈사, 정양사, 만폭동 등 금강산을 구경 시켜 드렸다. 금강산은 혼자 걷기에도 불편할 만큼 산세가 험준하다. 그같은 산길을 은사를 업고 다니는 석우스님을 보고 대중들이 감동받은 것은 당연한 일. 만공(滿空)스님과 만해(卍海)스님은 “금강산 양반스님”이라고 칭송했다. 연담스님은 “내가 죽고나면 번거롭게 장례를 치르지 말라”면서 “사십구재 때 장안사 스님들에게 베 장삼 한 벌씩을 보시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원적에 들었는데, 석우스님은 이를 실천에 옮겼다.


목욕탕서 깜짝 놀란 행자

○…선원에서 보름은 삭발하고 목욕하는 날이다. 금당선원에 주석할 때 한 행자가 스님을 모시고 목욕탕에 갔다. 등을 밀던 행자는 깜짝 놀랐다. 살이 많은 엉덩이는 부드러워야 하는데, 스님의 엉덩이 한곳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바닥에 닿는 엉덩이뼈 부분의 가죽과 살이 눌어붙어 딱딱해져 있었다. 크기는 손바닥 정도. 출가 이후 40년 넘게 오로지 화두 참구를 위해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정진한 결과였다.


만해스님 백성욱 박사와 정진

○…금강산 영원암에서 하안거를 할 때 였다. 만해스님이 찾아왔다. “금강산을 통째로 삼키고 계신 스님께 한수 배우러 왔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아니란 말이오” “한철 뒹글다 가려고 합니다.” “천하의 만해이신데,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실 것이지, 누가 막고 붙잡겠소.” “참으로 여여하십니다.” 세수는 만해스님이 네 살 아래였지만 서로 존경했다. 이때 ‘백 박사’로 불리던 백성욱 스님도 영원암에 방부를 들였다. 석우.만해.백성욱 스님 등 조선불교의 거봉들이 같이 지내며 정진했다.


“죽으면 잠은 원 없이 잘 수 있어”

○…“네 이놈. 죽으면 잠은 원 없이 잘 수 있어. 부처님 제자가 되어 수행한다는 놈이 벌건 대낮에 잠을 자다니….” 인자한 스님이지만 낮잠 자는 제자는 용서하지 않았다. 방석 위에 ‘時如時好不再來(시여시호부재래)’라고 써놓고 정진 했이다. “시간은 결코 다시 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스님은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경책했다. “물까마귀들을 조심해야 한다. 독사한데 물려도 사는 수가 있지만, 물까마귀한테 물리면 일생 망치고 중 신세도 끝이다.”

 

사진설명 : 석우스님이 수좌들을 지도했던 동화사 금당선원.

“시주 은혜 무서운 줄 알라”

○…“중이 되어 시은(施恩) 입은 것 모르면 안돼. 함부로 마구 쓰면 죄를 짓는 거야” 스님은 시주물의 소중함을 강조했다. 상좌들이 실수라도 시주물을 소홀히 다루면 날벼락이 떨어졌다. 고춧가루나 깨소금 등 양념도 공양간에 두지 않고, 당신이 직접 필요한 만큼 나눠 주었다. 심지어 불을 지필 때 성냥알 한 개만 사용하게 했다. 날씨가 고르지 않아 불을 켜지 못하면 “이런 고연놈. 성냥 한알도 귀하게 여기고 아껴야 한다”는 경책을 감수해야 했다.


열무김치와 된장찌개 즐겨

○…스님의 공양은 검소했다. 국 한 그릇과 반찬 한가지면 됐다. 특히 열무김치와 담백한 된장찌개를 즐겨 드셨다. 시은을 중히 여긴 스님은 단주 하나와 주장자 하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았다. 명예나 권력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종정도, 조실도, 주지도 ‘시절인연’으로 잠시 맡는 소임일 뿐 자리 자체를 탐하지 않았다. 샘물처럼 깨끗하고 바람처럼 시원하고 해처럼 따뜻한 어른이었다.


어머니 경담스님의 따끔한 경책

○…석우스님 모친은 장남을 찾기 위해 나섰다 출가했다. 금강산을 순례하던 석우스님은 우연한 기회에 용공사(龍貢寺)에 머무는 모친 경담(鏡潭)스님과 상봉했다. “접니다. 어무이.” “뭐라? 어무이라니?” “어무이” “이게 누고? 맞다! 니가 태영이 아이가”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와 아들이 스님이 되어 만난 것이다. 기묘한 인연이다. 그러나 또 다시 찾아온 아들에게 경담스님은 “기왕 출가했으니, 조상과 가족을 버린 죄, 그리고 세속 인연에 얽매여 성불하지 못하는 죄를 짓지 말라”며 수행정진을 당부했다. 걸망을 꾸려 용공사를 나서는 아들, 아니 석우스님을 보고 경담스님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출가자는 세속의 인연마저 끊어야 하지만, 어찌 천륜(天倫)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대구=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임종게 /

원적의 순간을 앞두고 시봉이 유게(遺偈)를 청했다. 스님은 “망상(妄想)을 말라”고 답했다. 거듭 간청 했다. 스님은 “그러면 나를 붙들어 일으켜라, 게(偈)를 지으리라”고 답한 후 붓을 들어 마지막 게송을 썼다. 한글 풀이는 동화사 조실 진제스님.

囊括乾坤方外擲(낭괄건곤방외척)

杖挑日月袖中藏(장도일월수중장)

一聲鍾落浮雲散(일성종락부운산)

萬朶靑山正夕陽(만타청산정석양)


주머니에 하늘과 땅을 잡아 넣어서

시방 밖에다 던져 버리고,

소매 가운데에 해와 달을 따 넣어

감춰버림이라.

종 한 소리 떨어지매 뜬 구름이 흩어지니

일만 푸른 산봉우리 이미 다 석양이로다.

 

 

행  장 /

‘보조어록’ 보고 38세 ‘늦깎이’출가

1875년 5월11일 경남 의령에서 부친 설상필(薛庠必)선생과 모친 정경씨(鄭景氏)여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속명은 태영(泰榮). 설총(薛聰)의 45세손이다. 글 읽기를 즐겨 한학을 깊이 연찬했다. 곤궁한 살림에 약초(藥草) 캐는 일을 생업으로 하면서 의서(醫書)에도 관심을 가졌다. 명의로 소문나 환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905년 부모의 간청으로 정보애(鄭甫愛)여사와 혼례를 올렸다. 딸 갑순(甲順)을 두었다.

망국의 소식을 들은 후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길인가 고민을 거듭하다 범어사에서 ‘보조어록’을 보고 전환점을 맞았다. 38세 되던 1912년 금강산 장안사에서 연담응신(蓮潭凝信)스님을 은사로 삭발하고 보화(普化)를 법명으로 받았다. 석우(石友)라는 법호는 동선의정(東宣義淨) 율사에게 구족계를 수지할 때 받은 것이다. 은사의 명으로 금강산 최대 최고 선원인 마하연(摩訶衍)에서 사제인 상월봉환(霜月奉煥).석하지명(石下芝明) 스님과 함께 정진했다.

20년간 금강산에서 수행하다가, 1935년 3월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서 열린 ‘조선불교수좌대회’에 참석해 조선불교 수호에 힘을 보탰다. 1937년 가을 상월스님과 함께 삼남(三南) 지방을 순회한 후 지리산 칠불암에 머물며 수행했다. 1945년 봄 사천(남해) 다솔사(多率寺)로 옮겨 주석하다 해방을 맞았다. 1954년 가을 해인사 조실로 추대했으며, 1955년 1월 고성 옥천사 백련암으로 자리를 옮겼다. 같은 해 8월 조계사에서 전국승려대회가 열려 대한불교조계종이 출범했다. 만장일치로 종정(宗正)에 추대됐으며, 종단 권유로 팔공산 동화사로 주석처를 옮겼다. 동화사에 금당선원을 연후 수좌들을 지도했다.

1958년 음력 12월27일 열반에 들었다. 세수 84세. 법납 45세였다.


[불교신문 2399호/ 2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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