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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얘기

강진 백련사의 동백

 

강진 백련사의 동백

 

가을을 맨 먼저 감지해내는 건 후각이다. 9월말에서 10월초, 시간대는 아침이나 저녁나절이 알맞다. 문득 현관문을 열면 가을의 독특한 체취와 조우한다. 코끝이 시큰하다는 표현으로는 서너 뼘 모자란다. 겨울의 냄새는 이것의 숙성 혹은 진화다. 뼈를 건드리는 추위와 뒤섞여 한층 진국이 된다. 여름의 전령사는 단역 촉각이다. 비만에 시달리는 천지의 기운은 온몸으로 견딜 수 없는 온기를 선사한다. 온 산하를 뒤덮은 녹색은 한없이 진부하다. 반면 봄은 자연이 가장 많은 색깔을 보유할 수 있는 시기다.

 

봄 처녀 다가오자 온 산하가 홍조로 물드네


▶ 백련사 앞마당에 떨어진 동백. 낙화해서도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겨우내 연금돼 있다가 다시 살판이 난 나무들은 건강의 표시로 일제히 꽃을 피운다. 시각은 인간의 유별난 공격성과 저돌성을 일깨우고 재우치는 감각이다. 시각이 가장 먼저 반응하는 봄은 그래서 경박스럽고 위험하다. 춘심에 취한 사람들도 꽃 사이로 마구 뛰쳐나와 아무나 붙잡고 논다. 바람나기 딱 좋은 계절은 곳곳마다 아름다운 지뢰를 뽐내고 있다.

강진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이 18년의 유배생활을 중 10년을 보낸 곳이다. 그는 백련사 옆에 지은 초당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살았다. 마이너리티를 사랑한 군주 정조는 1800년에 승하했다. 다산은 이듬해 벼르고 벼르던 노론에 의해 득달같이 숙청됐다. 정조의 능력주의 인사로 발탁된 다산은 기중기를 발명해 화성을 축조한 당대 최고의 테크노크라트(Technocrat)였다.

정조가 죽자마자 그의 정치생명도 끝났다. 유배가 풀린 뒤에도 다산은 죽을 때까지 조정에 복귀하지 못했다. 귀양지에서 남긴 서한에는 이미 재기를 체념한 듯한 심경이 엿보인다. 그는 아들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너희는 망한 집안의 자손’이라며 ‘죄인의 자식이 살아가는 방법은 오직 독서 뿐’이라고 냉정하게 말했다. 기약 없는 가난을 견뎌야 할 근검과 형제간의 우애만 강조했다.

귀양의 곤궁과 피폐에 굴복한 사대부들이 으레 그랬던 것처럼, 간드러지는 연군가로 임금에게 구걸한 흔적도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외려 ‘임금의 존경을 받아야지 임금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지 않다’며 꿋꿋이 거리를 유지했다. 어차피 다산은 정조 이외의 임금에 대해선 일절 기대하지 않은 것 같다. 그가 꿈꾸던 봄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백련사(白蓮寺)는 이름과 달리 연꽃이 아닌 동백의 사찰이다. 대웅보전에 있는 중수기 현판에 의하면 백련사는 신라 제46대 문성왕 재위 시 무염스님(無染, 801~888)이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백련이란 명칭에서 당시 유행한 신행결사의 한 근거지로 추정된다. 국운의 말기에 처한 신라인들은 끼리끼리 절에 모여 염불로 극락왕생을 도모하는 운동을 펼쳤다.

절은 고려시대에 크게 확장됐다. 1211년 원묘국사(圖妙國師) 요세(了世)가 중창했다. 월출산 약사난야(藥師蘭若)에 거주하던 요세스님은 이 지방의 독실한 불교 신자인 최표(崔應) . 최홍(崔弘) 형제와 이인천(李仁鬪)의 청으로 만덕산에 옮겨와 살게 됐다. 그의 제자 원영(元營).지담(之灌).법안(法安) 등이 나서 방사 80여 칸을 짓고 스승을 모셨다. 그래서 백련사는 만덕사라고도 불렸다. 1216년 낙성법회가 열렸다. 여말선초에는 왜구의 창궐로 거의 폐사되다시피 했다. 이후 절은 1426년 천태종 행호(行秊) 스님에 의해 몸을 추슬렀다.

광해군 시절에는 청허 휴정스님(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은 취여삼우(醉如三愚) 스님이 법회를 열며 옛 모습을 되찾았다. 1681년 란기(適寄) 스님이 사적이 오래돼 소멸될 것을 염려해 조종저(趙宗著)에게 글을 청해 ‘백련사사적비’를 세웠다. 다시 큰불을 만났고 절은 이지러졌다. 절의 여러 스님이 중건을 서원하고는 각자 분담해서 시주를 모았다. 1762년 4월13일 1년 만에 대법당의 중건을 마무리했다. 영조 36년의 일로 지난했던 명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기록이다.

1500그루에 달하는 동백림의 장관 앞에서 풍부했던 과거는 금세 지워지고 만다. 백련사가 남도답사의 주요 관문인 강진을 대표하는 명승이라면 백련사가 지닌 명성의 팔할은 동백의 몫이다. 백련사는 해마다 동백 덕분에 상춘객들로 북적이고 언론의 봄맞이 특집에서 늘 단골손님으로 등장한다. 이 많은 동백나무를 정약용이 혼자 다 심었다는 설이 있다.

10년이라는 유배기간을 고려하면 십분 억지 같은 풍문은 아니다. 4.3헥타르 면적에 7미터를 훌쩍 넘는 동백나무가 넉넉한 군락을 이뤘다. 주위에 비자나무, 후박나무, 왕대나무, 차나무도 많다. 백련사의 동백림은 꽃보다 잎이 더 빛났다. 한여름의 녹음처럼 깊고 진했다. 적막의 낙원에 서면 하늘이 잘 보이지 않는다. 다산이 세속적 희망에 그다지 연연해하지 않은 이유도 언뜻 이해가 간다. 굳이 왕이 성군이 아니어도 신세가 빈하고 시절이 박해도 능히 잊을 수 있을 만한 환영이다.



동백은 꽃이 피었을 때와 떨어질 때를

함께 보아야 제 맛이라고 한다.

동백은 꽃이 붉디붉어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다고 여겨질 때 마치 목이 부러지듯

송이째 낙화한다. 좀더 살고 싶었다는

몸짓인지 죽기만을 기다렸다는 몸짓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동백은 추운 겨울에 꽃을 피운다 해서 ‘동백(冬柏)’이다. 한겨울이라도 따스한 날씨가 며칠이라도 이어지면 여보란 듯 꽃을 피운다. 동백의 개화기는 빠르면 11월부터 늦게는 5월초까지, 봄꽃이라고 규정하기도 애매한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한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냉엄한 순리를 우습게 벗어나는 동백을 보면 누구나 운명의 극복에 관해 한번쯤 생각해 보기 마련이다. 어느 역사가는 조선에 대해 ‘멸망기에 접어든 이후로도 무려 3세기 이상을 존속한 특이한 국가’라고 비평했다.

<사진> 1500그루에 달하는 동백나무가 서식하는 동백림.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사실상 국력이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곧 한국의 르네상스라 상찬되는 영.정조 시대는 엄청난 행운의 시대였다. 반면 조선의 19세기는 한숨이 절로 나오는 외침과 수탈의 역사다. 다산은 여기까지가 왕조의 끝임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에 대해 포기하지 못했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지식인이었다. 살면서 쌓아온 무수한 앎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풀어놓아야 했다.

다산은 유배기간 동안 대대적인 국가제도 개혁안인 <경세유표>와 벼슬아치들의 덕목을 담은 <목민심서> 등 장장 500권의 저서를 집필했다. 살아서는 결코 빛을 볼 수 없는 책이었고 자기를 위한 희망이 될 수 없는 책이었다. 어쩌면 동백의 끈기로 인해 동백을 심었던 그의 손이 끝까지 붓을 놓지 않았으리란 생각. 때가 되면 언제나 살아 돌아오는 봄은 인간에게 유익한 착각을 선물한다.

시인 김영랑(1903~1950)의 고향도 강진이다. 그는 1년의 절반 가까이를 생존할 수 있는 동백을 보며 존재의 영속성을 노래했다.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도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뻔질한 은결을 도도네 /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근대 자유시에서 보이는 투박한 수사가 눈에 밟히고 정확히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떨어진 꽃잎이 땅바닥에 나뒹구는 위로 화사하게 만발하는 동백의 뻔뻔한 특성을 관찰하고 나면, 왜 마음에 끝없는 강물이 흐른다고 했는지 희미하게나마 짐작이 된다.

동백은 꽃이 피었을 때와 떨어질 때를 함께 보아야 제 맛이라고 한다. 동백은 꽃이 붉디붉어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다고 여겨질 때 마치 목이 부러지듯 송이째 낙화한다. 좀더 살고 싶었다는 몸짓인지 죽기만을 기다렸다는 몸짓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다시 봄이다. 달아났던 입맛을 되찾았고 감기는 가뿐하게 치러줬다. 새로 시작하는 연인들과 그들을 위한 이런저런 상혼이 거리에 넘쳐날 것이다. 눈을 뜬 채 죽어 있는 동백은 또 어떤 나무에서 재생을 준비할까, 아니면 강요받을까.

강진=장영섭 기자 fuel@ibulgyo.com

[불교신문 2413호/ 3월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