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런저런얘기

‘대가람의 위용’ 손에 잡힐 듯 생생

 

‘대가람의 위용’ 손에 잡힐 듯 생생

‘근세불교 미공개 자료를 찾아’ ②1920년대 구암사ㆍ벽련암 사진 발굴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순창 구암사와 정읍 벽련암의 일제강점기 모습이 담긴 사진이 나왔다. 언론을 통해 처음 공개되는 구암사와 벽련암의 흑백사진은 수많은 근세 고승을 배출했던 도량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번에 공개된 사진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구암사 

 <사진> 1920년대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순창 구암사. 출처=구암사



                                                                        
1천여 고승들의 수행 도량 위세 느껴져 

                             
                                                                        
6ㆍ25때 소실…중건과정서 옛모습 확인

                                                                        


구암사(龜岩寺)는 조선 중.후기 선풍(禪風) 선양의 중심도량이다. 한때 1000여명의 스님들이 정진할 만큼 ‘대가람’ 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당시 소실됐다. 이번에 공개된 흑백사진은 소실되기 이전 ‘웅장했던 구암사’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소실 이전의 모습을 확인하게 하는 자료이다.

사진에는 ㄱ 자 모양의 건물과 독립된 건물의 모습이 전부 또는 일부가 나타나 있다. 또한 ㄱ 자 건물 앞에는 10명 정도의 인물이 서 있는데, 대부분 흰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작은 키의 어린이 3명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사찰 주위의 울창한 산림과 깨끗하게 정돈된 마당은 당시 수행자들의 생활을 대신 말하고 있다.

서기 623년(백제 무왕 24년) 숭제(崇濟)스님이 창건한 구암사는 임진왜란 당시 소실됐다가 화엄종주(華嚴宗主)로 불리는 설파상언(雪坡尙彦, 1707~1791)스님이 주석하면서 중건했다. 뒤를 이어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스님이 선강법회(禪講法會)를 열어 선풍을 진작했다. 백파스님은 추사 김정희, 노사 기정진 등 당대의 학자들과 교류할 만큼 학식과 덕망이 높았다. 구암사에는 최남선이 “삼문(三門) 기둥에 추사의 대련(對聯)이 붙은 집이 있다”고 했을 만큼 추사의 작품이 많았는데, 한국전쟁 당시 모두 소실됐다. 이번에 공개된 사진은 상태가 좋지 않아 추사의 글씨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백파스님 이후에는 설두유형(雪竇有炯, 1824~1889).설유처명(雪乳處明, 1858~1903).정호한영(鼎鎬漢永, 1870~1948) 스님 등이 주석하면서 후학을 양성했다.

최남선은 ‘심춘순례’라는 글에서 “영호(映湖)를 중심으로 한 구암사와 구암(龜巖)을 원두(源頭)로 한 조선불교의 여명(黎明) 운동은 최근 불교 사상(史上)에 이미 중요한 책장(冊張)을 차지한다”고 했다. 그랬던 구암사의 옛 모습을 이제는 사진으로 만 만날 수 있다.

구암사 주지 지공스님은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구암사를 중건하는 과정에서 옛날 사진을 구하게 됐다”면서 “선대의 스님들이 가꿔온 구암사의 전통을 다시 살리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순창=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벽련암

 <사진> 1920년대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내장산 벽련암. 출처=벽련암

         


 예나 지금이나 화려한 그 모습 그대로
                                                                  

 사진 속 4명 복색서 ‘일제시대’증명해
 

                

서래봉 아래 자리한 벽련암(碧蓮庵)의 건물이 담겨있는 흑백사진은 지금도 변함없는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고 있다.

두 팔을 벌린 듯 좌우로 길게 뻗은 건물은 벽련암의 예전 위상과 사격(寺格)을 웅변하는 듯하다. 건물 뒤에는 대나무로 보이는 나무들이 연병장을 가득 채운 군인들처럼 벽련암을 외호하고 있다.

또한 건물이 자리한 절 마당을 지지하는 축대는 크기가 어른 5~6명의 키를 합한 것처럼 웅장하고 견고해 보인다. 마당에는 흰색 두루마기를 입은 4명의 인물과 검은색 두루마기를 입은 인물 1명이 서 있다. 스님들로 보이는 이들은 조선후기와 일제강점기 복장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정읍 내장산 벽련암은 예로부터 “필추(苾芻, 비구승)들이 선(禪)에 들어가 도(道)를 배울 좋은 땅”이란 명성을 들을 만큼 ‘이름난 수행처’이다. 석전 박한영스님도 “산심벽련사(山心碧蓮寺) 백정보강개(白淨寶綱蓋)”라고 했다. “산 속에 벽련사, 새 하얀 보배로 일산(日傘)을 덮어 놓은 듯”이란 뜻이다.

육당 최남선도 “본금강(本金剛)의 마하연(摩河衍)에 해당하는 곳”이라면서 “백학명 선사의 깊은 증오(證悟)와 날카로운 기봉(機鋒)이 이곳을 선불장(禪佛場)으로 하여 크게 현양(顯揚) 발휘되길 바란다”고 했다.

벽련암은 내장사 중흥조인 학명스님이 머물며 선농일치를 실천했던 유서 깊고 의미 있는 도량이다. 이번에 공개된 사진은 벽련암 정혜루에 걸려 있다.

벽련암 주지 진공스님은 “그 어느 사찰 보다 아름다웠던 벽련암의 옛날 모습을 잊지 않고, 더욱 잘 수호하여 후대에 물려주는 일이 ‘지금의 우리들이 할 일’이다”면서 “이 사진을 통해 우리 문화와 성보문화재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재인식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정읍=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조선후기 이후 근세불교자료를 보관하고 계신 분들은

  불교신문사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soolee@ibulgyo.com soolee87@naver.com



[불교신문 2444호/ 7월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