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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가봐야 할 사찰] 인욕바라밀을 배우는 안성 칠장사

伯松金實根 2022. 7. 20. 08:00
억울한가요? 모진소리 들었나요? 여기 가보세요~


‘혜소국사와 일곱 도적’. 안성 칠장사 뒷산을 칠현산(七賢山), 절 이름을 칠장사(七長寺)라 부르게 된 연유, ‘혜소국사와 일곱 도적’ 이야기가 담긴 벽화. 나한전에서는 혜소국사에게 감화를 받고 수행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 ‘일곱 아라한’도 만나 볼 수 있다.

 

혜소국사가 일곱 명의 도적을 교화한 내용 

궁예의 활쏘기 연습. 병해대사와 임꺽정 등 

의적들의 모습이 그려진 명부전 벽화 ‘눈길’

 

장원급제해 백성들을 보살피며 살아간 어사

박문수이야기 깃든 나한전엔 입시기도 발길

 

우리는 살면서 억울함을 당하기도 하고, 모진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러나 끝내 참고 견디다 보면 자신이 옳았음을 확인하기도 한다. 안성 칠장사에는 인욕바라밀이 부처를 이루는 지름길임을 알려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일곱 도적’, ‘임꺽정’, ‘인목대비’, ‘박문수’가 그러하고 ‘궁예’가 그러하다. 이들은 시련을 극복하는 삶을 살았거나 자만에 빠져 생을 망치기도 했다. 





안성 칠장사 대웅전(보물). 경기도 지역의 조선 후기 사찰 건축 현황을 잘 보여준다.

혜소국사와 일곱 도적 그리고 궁예 

일곱 도적은 혜소국사의 교화로 아라한으로 다시 태어났다. 혜소국사비문에 “국사의 헤아릴 수 없는 신통은 다겁생에 걸쳐 만행을 닦음에 기인한 것이며, 끝없는 시간 동안 중생을 제도하였으니, 부처님의 분신이라 말하기에 충분하다”고 하였다. 도적들이 칠장사에서 샘물을 마실 때는 분명 금 바가지였지만 소굴로 가져가면 박 바가지가 됐다.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찮은 바가지에도 탐욕이 앞서니 금 바가지로 보였을 터. 도적의 욕심을 불심(佛心)으로 바꾼 혜소국사의 신통력에 감화를 받은 도적은 수행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이 일곱 아라한은 돌이 되었어도 신통력으로 알려준 ‘몽중등과시(夢中登科時)’로 박문수는 장원급제하여 백성들을 보살피는 삶을 살았다. 이런 까닭에 칠장사 나한전은 매년 입시 기도로 북새통을 이룬다. 



활 쏘는 궁예 모습을 볼 수 있는 벽화. 궁예가 칠장사에서 활쏘기를 하며 유년기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나한전 옆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600년이 넘은 낙락장송이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신령스러운 아름다움은 볼 수 없다. 그리고 칠장사는 신라 말 경주에서 피신 온 외눈박이 어린 궁예가 호연지기를 기르며 미래를 꿈꿔왔던 곳이다. 활을 잘 쏘아 궁예(弓裔)라 했다. 백성들이 추앙하는 왕이 되었지만 궁예는 스스로 ‘미륵’이라 칭하며, 관심법(觀心法)을 내세워 요망한 행동을 일삼았다. 그는 결국 왕건에게 쫓겨 평강에서 보리 이삭을 훔쳐 먹다가 백성에게 붙잡혀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조선후기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조선의 3대 의적(義賊)으로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임꺽정을 꼽았다. 이들 도적은 착취당해 더는 살아갈 수 없는 농민들의 목숨 건 저항의 상징이었다. 백정 출신 임꺽정은 이곳 칠장사에서 갖바치 병해대사의 가르침으로 글과 무술을 배워 통쾌하게 탐관오리를 벌하였다고 하니 여름날 소나기처럼 시원하다. 임꺽정은 ‘꺽정불’이라 불리는 부처님을 조성하여 중생과 함께 동고동락하길 발원했다고 한다. 혜소국사가 일곱 명의 도적을 교화한 내용과 외눈박이 궁예의 활쏘기 연습. 그리고 병해대사와 임꺽정 등 의적들의 모습이 명부전 벽화에 그려져 있다. 

인고의 인목대비…마침내 원찰로 삼다 

이와 더불어 칠장사에는 인고의 세월을 오직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생을 살아온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의 계축옥사(癸丑獄事)로 서궁에 10년간 갇혔을 때 고통스런 나날을 <금광명최승왕경> 사경과 염불로 참고 견디었다. 이때 우상 한효순이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며 인목대비의 죄목을 언급하는데 “날마다 요망한 경전을 읽으며 큰 복을 비니 그것이 죄”라고 했다. 그러나 서궁에 갇힌 인목대비는 오직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했다. 또한 극비리에 친필 금광명최승왕경 10권 1질과 친필 족자를 칠장사에 보내 계축옥사로 숨진 사람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였다.


인목대비 글씨. 늙은 소의 고달픔과 그것을 바라보는 주인의 애처로운 마음을 자신의 처지에 비유한 것이라고도 한다.

훗날 정조대 명재상 채제공은 칠장사에서 인목대비가 사경한 금광명최승왕경과 친필족자를 손을 씻은 후 경건히 열람하고 인목대비의 축원 내용을 보고 “누구나 감흥 할 것”이라 했다. 인목대비는 서궁 유폐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나타냈다.

“늙은 소 힘을 쓴 지 오랜 세월이라 목덜미 가죽은 닳아 그저 졸릴 뿐 쟁기질도 끝나고 봄비도 넉넉한데 주인은 어찌 또 채찍을 든단 말인가.” 이 시는 본래 명나라 때 장면(蔣冕)이 황제가 보낸 시에 회답으로 보낸 시이지만 인목대비는 본래의 작시 의도와는 달리 이시에 빗대어 원망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인조반정으로 복위된 인목대비는 1623년 칠장사를 중수하고 원찰로 삼아 1613년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 대비 형제 등 희생된 가족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였다. 

인목대비 비원 서린 ‘야단법석불화’ 

특히 1628년에 조성된 오불야단법석불화(五佛野壇法席佛畵, ‘오불회괘불도’, 국보)에는 인목대비의 비원(悲願)이 서려 있다. 칠장사 야단법석불화는 길이 6.56m, 폭 4.04m의 크기에 신령스런 기운으로 상·중·하 3단에 오불을 모셨다. 상단은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의 삼신불(三身佛)을 표현했고, 그사이에는 부처님의 십대제자와 화불을, 위쪽 좌우에는 여래팔부중이 외호하고 있다. 중단 좌측에는 약사여래불을 중심으로 일광·월광보살이 협시하고 4대보살과 약사여래 십이지신장이 둘러싸고€있다. 위에는 범천과 금강역사가, 아래에는 지국천왕과 증장천왕이 호위하고 있다. 중단 우측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5대보살과 제석천, 금강역사가 에워싸고, 아래에는 광목천왕과 다문천왕이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다. 

하단은 지장보살, 미륵보살, 관세음보살이 주관하는 세계를 표현하였다. 하단 중앙에 나타난 황룡의 모습은 이 야단법석불화의 최고의 매력이다. 이 용은 도솔천 내원궁을 향하는 선조 임금을 묘사했다. 신령스런 기운 위에 갑자기 나타난 내원궁의 모습을 황룡이 떠받들고 있는 모습이다. 그 아래는 감금되어 서궁에 유폐(幽閉)되었던 인목대비와 정명공주가 그려져 있고, 스님 복장의 한 사람이 머리를 조아린 채로 손을 들어 대비에게 인사를 올린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이 사람은 인목대비의 친정 조카인 김천석이다. “김천석은 허름한 옷으로 변장하고 승도(僧徒) 속에 숨어 11년 동안 산골을 전전하였는데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좌측에는 기암괴석에 앉은 관음보살이 선재동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고, 우측에는 지옥의 구세주인 지장보살이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등을 거느리고 있다. 

잠시 멈추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곳 

맨 아래에는 화엄성중과 스님으로 보이는 인목대비의 조카 김천군과 계축옥사로 희생된 사람들이 표현되었다. 이 불화를 통해 인목대비는 남편 선조가 도솔천에, 계축년 옥사로 비명횡사한 아들 영창대군, 아버지, 친정 가족들과 이로 인해 죽은 사람들이 극락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인목대비의 비원을 엿볼 수 있다.

혜소국사는 천 년 전 “대저 인생이란 마치 번갯불과 같이 신속하며 바람과 같이 지나가고 별이 사라지면 해가 뜨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바쁜 마음을 쉬면 번뇌도 사라지는 법. 번갯불과 같은 인생에서 잠시 멈추고, 덜어내는 나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이 인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불교신문 3723호/2022년7월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