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가봐야 할 사찰] 네 가지 은혜를 갚은 경주 감은사지
경주 감은사지 금당 앞에 나란히 서 있는 동·서 삼층석탑.

“경주 가거든 문무대왕 위적(偉蹟)을 찾으라”
“보시하여 부족한 것을 구호하는 것과 어질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백성 보기를 자식 같이하는 것
백성을 이롭게 하되 올바른 선정으로 교화하는 것
이익을 같이해 아랫사람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니
왕이 이같이 하면 항상 복을 얻으리라. 지난 세상에
삼보 부모 국왕 중생, 이 네 가지의 은혜를 행하여
수 없는 세상을 쌓아 왔으므로 부처가 되었느니라.”
…
“구경거리로 쏘다니지 말고 그 정신을 기려 보라”
호국의 달을 맞아 호법·호국·호민을 위해 애쓴
문무대왕의 정신을 다시 한 번 느껴보았으면 …
<반니원경(般尼洹經)>에서 부처님께서는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네 가지의 은혜를 힘써 행하여 백성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보시하여 부족한 것을 구호하는 것과 어질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백성 보기를 자식과 같이하는 것, 백성을 이롭게 하되 올바른 선정(善政)으로써 교화하는 것, 이익을 같이하여 아랫사람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니 왕이 이와 같이하면 항상 복을 얻으리라. 내가 지난 세상에 이 네 가지 은혜(삼보, 부모, 국왕, 중생의 은혜)를 행하여 수 없는 세상을 쌓아 왔으므로 부처가 되었느니라.”
어떻게 하면 백성을 편안하게 할까?
감은사지는 지리적으로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양북면을 가로질러 동해로 흘러드는 대종천의 하류에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주 감은사(感恩寺)는 신문왕이 부왕 문무대왕의 은혜를 갚기 위해 세운 절로만 생각한다. 어찌 이것뿐이겠는가? 문무대왕과 신문왕은 수많은 경전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네 가지 은혜를 갚기 위해 사찰을 세웠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은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까 노심초사했다. 문무대왕은 불력(佛力)으로 외적을 진압하고자 바다로 쳐들어오는 당나라 군대를 막기 위해 경주 낭산 밑에 사천왕사를 짓고 명랑법사의 문두루비법으로 그들을 물리치고, 676년 삼국을 통일했다. 또한 동해구에 진국사(鎭國寺)를 짓던 도중 681년에 죽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무대왕은 죽으면서 동해 가운데 큰 바위 위에 장사지내라는 명을 내렸다. 왕은 평소 지의법사에게 말하기를 “짐은 죽은 뒤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 불법(佛法)을 높이 받들고 나라를 지키길 원하오”라고 하여 호법(護法)과 호국(護國)을 서원하였다. 이에 법사가 “용이란 축생의 과보가 되는데 어찌합니까?”라고 하였다. 다시 왕이 말하기를,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되어, 만약 거친 과보를 받아 축생이 된다면 짐이 품은 뜻에 합당하다”고 했다.
무릇 용은 부처님을 지키는 제 일인자로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께서 선정에 드셨을 때 무칠린다(Mucalinda) 용왕은 부처님을 지켜 최초의 화엄성중이 되었다. 불심 깊은 문무대왕은 이 용왕처럼 부처님과 백성들을 지키길 서원했다. 또한 문무대왕은 “자신의 유해를 열흘 후에 사천왕사 바깥뜰에서 인도의 장례의식에 따라 화장(火葬)할 것과 장례는 검소하고 간략하게 할 것, 화장하고 수습한 유골 혹은 재를 무덤을 세워 지하에 묻지 말고 동해구의 대왕암에서 장사지내라”는 유조(遺詔)를 내려 자신의 장례에 대해 상세하게 명하여 왕의 주검을 화장한 우리나라의 첫 사례가 되기도 했다.
“도는 귀하게 몸은 천하게”
문무왕릉 비문에 “진리에 응(凝)하셨고, 도는 귀하게 몸은 천하게 여기셨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뜻을 공경하였다. 장작을 쌓아 화장을 하여 뼛가루를 동해구에 뿌렸다”고 칭송했다. 문무대왕이 죽자 아들 신문왕은 아버지의 유조에 따라 사천왕사에서 북쪽으로 약 700m 떨어진 능지탑지(陵旨塔址)에서 화장을 했다. 그런데 뜻밖에 문무대왕의 사리가 나왔다. <대반열반경>등의 경전에 보이는 전륜성왕의 장례 방식으로 호국삼부경 중의 하나인 <법화경> ‘견보탑품’처럼 682년에 감은사에 쌍탑을 조성했다. 감은사지 금당 앞에 나란히 서 있는 석탑의 높이는 서탑이 13.7m, 동탑이 13.3m이다.

1959년 서탑을 해체하였을 때 수정 사리병에서 사리 1과가 발견되었다. 삼국이나 통일신라시대 불탑에 봉안된 부처님의 사리는 거의 1~2과임을 감안할 때 서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불탑이 분명하다. 또한 사리내함에 표현된 주악 천인들은 법화경 ‘방편품’의 천인들처럼 동발, 횡작, 당비파, 요고를 연주하여 부처님의 사리를 찬탄하고 있다.

1996년 동탑 해체 시 서탑과는 달리 사리내함 수정 사리병에서 54과의 사리가 발견되었다. 많은 양의 사리로 보아 문무대왕의 사리를 동탑에 봉안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리병 위에는 불꽃무늬의 보주를 올려놓았고, 주변으로는 네 명의 스님들이 법을 설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어 서탑과 차이를 보인다. 동·서탑 사리외함은 위엄이 서린 사천왕을 타출기법으로 돋을새김 하여 사방에 나타냈다. <금광명경> ‘사천왕호국품’에 “부처님이시여, 우리들 사천왕은 제각기 거느리고 있는 500 귀신과 함께 언제나 금광명경 법문을 설하는 이를 따라 다니면서 수호하겠나이다”하고 서원하여 호법·호국사상을 감은사 불탑 사리장엄구에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실물로 남겨진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감은사 금당은 어떻게 지었을까?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에는 “절 기록에 이르기를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하여 처음 이 절을 짓다가 끝내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으며,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682년에 끝마쳤다. 이때 금당 섬돌 아래를 파고 동쪽으로 구멍 하나를 뚫었는데 용이 절 안으로 들어와 서리도록 하였다. 대개 유조에 따라 뼈를 묻은 곳을 ‘대왕암’이라 했고 사찰의 이름을 ‘감은사’라고 했다. 후에 용이 나타난 모습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 했다”고 전한다.

이 내용으로 보아 바닷물이 들어오고 용이 머물 수 있는 독특한 공간으로 금당을 지었을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유구를 보더라도 동·서 방향으로 크고 긴 돌을 마루널처럼 잇대어 깔아 약 60㎝ 높이의 지하 공간이 마련되었고, 금당 앞뜰에는 용이 쉬는 연못, 용연(龍淵)도 조성되었다. 대왕암을 집으로 삼고 있는 동해의 해룡이 된 문무대왕이 대종천을 따라 감은사 금당에 들어와 부처님의 법문을 들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아들 신문왕의 효심이 느껴진다. 금당 내부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셨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항마촉지인은 외적의 침입을 막는 상징적인 의미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금당 앞 석재 중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어 특이하다. 일반적으로 음양의 조화를 나타낸 문양이라고 하지만 서로 꼬리를 물고 회전하는 형태의 태극은 길상을 뜻하는 만(卍)자와 닮았다. 이 문양은 부처님 말씀과 네 가지 은혜의 영원함을 뜻하는 표현은 아닐까?
우현(又玄) 고유섭(1905~1944) 선생은 “경주에 가거든 문무대왕의 위적(偉蹟)을 찾으라. 구경거리로 경주로 쏘다니지 말고 문무왕의 정신을 기려 보라”고 했다. 호국의 달을 맞이하여 호법·호국·호민을 위해 애쓴 문무대왕의 정신을 다시 한 번 느껴보았으면 한다.
[불교신문 3720호/2022년6월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