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유적과사찰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사찰] 완주 송광사

伯松金實根 2022. 4. 12. 08:00
법계로 집을 짓고 계율로 담을 쌓은 절 


완주 송광사 대웅전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본존불인 석가여래를 중앙에 모시고, 좌협시(향우측)로는 약사여래를, 우협시(향좌측)로는 아미타여래를 배치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진흙으로 조성된 불상 가운데 가장 큰 삼세불상이다.

 

“잘 지키면 견고하고 살다보면 편안하다”

 

“전각과 곁채, 재각과 문이 붉디붉고 반듯반듯하다…

법륜의 성대한 아름다움이 여기에 지극하다.

내 옛날의 잘 지은 집을 들었는데, ‘성품의 바다로

지역을 삼고 법계로 집을 지으며, 계율로 담을 만들고

지혜로 문을 이루어, 잘 지키면 견고하다 …”고 했다.

- 신익성 作 ‘송광사 개창비 비문’

 

종남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송광사는 의승대장 벽암 각성스님이 개창(開創)하였다. 한국 선맥의 정통을 자랑하는 곳이며 호국의 정신이 숨 쉬는 곳이다. 일주문부터 금강문, 천왕문, 금당에 이르기까지 일렬로 서서 흐트러짐이 없어 부처님께서 승병을 사열하는 것 같다. 대웅전 앞엔 의승군, 그 뒤 천왕문은 사천왕, 중간 금강문은 금강역사, 맨 끝 일주문엔 용왕 부대의 도열로 군율이 느껴진다.

완주 송광사와 순천 송광사는 한자도 같아 혼동되나 인연의 연결 고리로 보면 그 뿌리가 같음을 알 수 있다. 송광사 개창비에는 “고려 보조국사 지눌스님께서 종남산을 지나다가 신령스런 샘물을 마시고 그 물맛을 기이하게 여겨 돌을 쌓아 메워 두고 그런 후 순천 송광사를 지었다. 반드시 훗날에 덕을 펼칠 자리로 없어지지 않을 터이다. 이후 수백 년이 지나 응호, 승명 등 스님들이 서로 마음을 맹세하고 국사의 뜻을 성취하고자 정성스럽게 모연을 해, 1622년에 절을 짓기 시작하여 1649년에 완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주문 주간포의 청룡은 팔자 좋게 몸통을 8자로 꼬고 있어 ‘이 절에 오는 사람은 팔자가 좋아진다’는 말도 전한다.

이 절에 오는 사람은 팔자가 좋아진다?

1626년에 세운 일주문에는 ‘종남산송광사(終南山松廣寺)’라는 편액이 걸려있고 기둥의 앞뒤로 연꽃무늬 보조기둥을 세워 안정감을 주었다. 용머리를 조각한 공포는 다포의 화려함과 맞배지붕의 깔끔함으로 고풍스럽고 짜임새가 있다. 종남산은 원래 서방산(西方山)이라 했으나 의상스님이 화엄을 공부했던 중국의 종남산 이름으로 고쳐 화엄도량을 개창하였다. 벽암 각성스님은 이 절을 완공하고 1000여 명의 대중들과 함께 50일간 화엄법회를 개설하여 의상스님의 화엄 종지를 받들었다. 일주문 주간포의 청룡은 팔자 좋게 몸통을 8자로 꼬고 있어 ‘이 절에 오는 사람은 팔자가 좋아진다’고 하니 눈여겨 볼만하다.

진흙으로 만든 높이 425cm의 거대한 사천왕 가운데 서방 광목천왕과 북방 다문천왕. 조선후기 사천왕상 가운데 뛰어난 조형성을 갖춘 수작으로 꼽힌다.

1636년 이전에 지어진 금강문에는 1656년쯤 진흙으로 조성된 밀적과 나라연금강이 있다. 눈을 부릅뜨고 송곳니가 튀어나온 모습이지만 정감이 간다.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에 부처님께서 금강역사에게 “그대들은 <반야바라밀경>을 받아 지녀라. 이 경은 한량없는 공덕이 있으니, 집을 보호하는 공덕과 또한 일체중생의 몸을 보호하는 것이 이 반야바라밀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금강역사는 지혜의 완성을 통해서 중생들을 보호하는 힘을 지니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국왕이 지혜로우면 나라가 부강하고 국왕이 어리석으면 백성들이 외부로부터 침략을 당한다는 것을 일러주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대들은 반야바라밀경을 받아 지녀라”

천왕문은 선행의 실천으로 천상세계에 태어날 수 있음을 알려주는 곳이다. 사천왕의 인자함과 용맹스러움은 창건주 벽암 각성스님을 닮은 듯하다. 스님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을 도와 해전에서 큰 전공을 세웠고 팔도도총섭으로 국가의 지원 없이 오직 스님들의 힘으로 2년 5개월 만에 남한산성을 쌓았다. 또한 병자호란 때 의승군 3000여명을 모아 인조왕의 구출을 시도했으나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함으로써 구국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듯 벽암 각성스님의 호국 정신은 위엄있는 사천왕으로 재탄생되었다.

1636년 이전에 지어진 천왕문에 1649년에 조성된 가장 오래된 높이 425cm의 진흙 사천왕이 있다. 균형 있는 신체 비례, 생동감 넘치는 얼굴 표정, 갑옷의 정교함, 옷 주름의 유연함 등 제작기법이 뛰어나 요즈음 말로 하면 몸짱, 얼짱이다. 뿐만 아니라 발밑에는 4명의 악귀가 사천왕의 발을 들며 신이 난 표정이다. 자신은 벌을 받아야 하는 처지인데도 적반하장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눈을 부라리니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천왕문 뒤에는 ‘천왕전’이라는 편액을 달아 사천왕의 격을 높였다. 문 내부 단에는 향과 초 등 공양물을 올려 항상 예경할 수 있도록 했다.

종루(鐘樓). 다포 팔작지붕을 교차시켜 추녀 끝을 살짝 들어 올린 2층 아자형(亞字形) 누각으로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자랑거리다.

천왕문을 지나면 넓은 대웅전 앞마당 좌측에 1657년 무렵에 지어진 아름다운 범종루가 있다. 다포 팔작지붕을 교차시켜 추녀 끝을 살짝 들어 올린 2층 아자형(亞字形) 누각은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자랑거리다. 아래층은 자연석 기단위에 기둥을 세웠고, 위층은 마루를 깔아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달아 두었다. 또한 1716년 광주 증심사에서 주조된 범종의 음통에는 두 마리 거북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기어오르는 모습이 앙증맞다. 거북이처럼 오래 살고픈 마음이 느껴진다. 또한 천판에는 59개의 연꽃잎 속에 화불(化佛)이 나타난 모습은 경이롭다. 몸체에는 주상,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하기를 바라는 ‘주상삼전수만세(主上三殿壽萬歲)’란 원패가 새겨져 있어 눈여겨 볼만하다.

‘선종대가람사(禪宗大伽藍寺)’

1622년부터 시작하여 1623년 봄에 대웅전 터를 닦고, 1634년에 상량했다. 1641년에 중층 대웅전을 마련하고 석가모니불, 약사여래, 아미타불을 봉안하여 낙성함으로써 20년간 지속된 불사를 마무리 했다. 당시 인조왕은 ‘선종대가람사(禪宗大伽藍寺)’라는 사호(寺號)를 내려 송광사의 위상을 높였다. 대웅전 편액의 글씨는 선조의 아들 ‘의창군 광’이 썼으며, 삼세불은 569cm로 진흙으로 조성된 부처님으로는 가장 크다.

송광사 삼세불의 조성기에는 주상,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봉림대군과 신하들의 무사 환국과 전쟁으로 죽은 병사들이 극락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했다. 소헌 세자는 황금을 시주하여 삼세불 개금불사를 도왔다. 대웅전은 1857년 중창 때 단층으로 고쳤다. 삼세불 좌우에는 왕과 왕비 그리고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높이 약 230cm의 커다란 목조 삼전패(三殿牌)는 여러 장의 나무판을 엮어서 구름과 용을 뚫어 새겨 정교하게 조각했다.

송광사 대웅전 부도전에는 ‘벽암당(碧巖堂)’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암 각성스님의 부도가 있다. 스님은 1660년 세수 86세, 법랍 73세로 화엄사에서 입적, 사리는 송광사, 화엄사, 해인사, 법주사에 나누어 봉안했다. 대웅전 뒤에 있는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 지은 송광사 개창비 비문에는 “전각과 곁채, 재각과 문이 붉디붉고 반듯반듯하다고 하니 법륜의 성대한 아름다움이 여기에 지극하다. 내 옛날의 잘 지은 집을 들었는데, ‘성품의 바다로 지역을 삼고 법계로 집을 지으며, 계율로 담을 만들고 지혜로 문을 이루어, 잘 지키면 견고하고 살다보면 편안하다”고 했다. 완주 송광사의 일주문에서부터 대웅전까지의 일직선은 오직 부처님께 귀의 할뿐 무언가 마음에 잘못된 빈틈이 없음을 알려준다.

 

[불교신문 3710호/2022년4월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