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가봐야 할 사찰] 관악산 연주암
기암절벽 정상에 위치한 연주암 연주대. 한번 오른 사람들은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 듯 가슴이 탁 트이고 번뇌가 사라지는 즐거움을 느낀다고 한다. 최근에는 템플스테이와 기도 도량으로 명성이 높아가고 있다.

“세상살이에 비한다면 오히려 평탄한 길”
서울 근교에 신령스런 구슬이 있는 별천지가 있으니 이곳이 바로 관악산 연주암이다. 해발 629m의 기암 절벽위에 위치한 연주대는 한번 오른 사람들은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 듯 가슴이 탁 트이고 번뇌가 사라지는 즐거움을 느낀다. 항상 스님들의 독경 소리와 중생들의 예경이 멈추지 않는 연주암은 677년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관악사라 하였으며 관악산 정상에 영주대(靈珠臺)를 쌓아 신령스런 별천지를 열었다.


‘왕실 주목’ 효령대군 영정 봉안
연주암은 조선 초 효령대군에 의해 중창되는 등 왕실의 주목을 받았다. 효령대군은 이곳에서 2년간 머무르며 불교 공부와 불사에 적극 참여했다고 전한다. 이로 인해 연주암은 조선 초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는 효령대군 영정을 효령각에 봉안하고 있다.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은 큰 체격의 효령대군이 지휘관을 상징하는 등채를 오른손에 잡고 용좌에 앉은 당당한 모습이다. 효령각 주련은 임금 자리를 버리고 불교에 귀의한 대군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출자왕국통불역(出自王宮通佛域) 앙첨천국상선대(仰瞻天國上仙臺), 스스로 왕궁을 나와 부처님 계신 곳 왕래하니 영주대 높은 곳에서 우러러 불국을 바라보네.”
원래 관악산 연주대(戀主臺)는 의상대사가 화엄의 진리를 나타내 보이기 위해 신령스런 구슬을 모신 대(臺)를 만들어 영주대(靈珠臺)라 불렀다. 영주는 <화엄경>의 “파도 밑에 신령한 구슬이 숨어 있다네(波底隱靈珠)”란 말에서 나온 이름이다. “식(識)의 물결과 파도 속에는 마음의 진주가 절로 숨어 버리지만, 마음의 티끌 속에 깨달음의 자성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비유해 결국 영주는 불성(佛性)을 상징하고 있다.
세종 25년(1443) 6월 성간(成侃)은 ‘유관악사북암기(遊冠岳寺北巖記)’에서 “서쪽 비탈로부터 오르기 시작하여 가다가 또 북으로 휘어드니 산 형세가 날카롭게 솟았다. 그래서 넝쿨을 부여잡고 겨우 올라가 보니, 집채 같은 바위가 빙 둘러 있는데, 그 밑은 거의 천 길이나 되는 것 같아서 처음에는 정신이 아찔했다”며 영주대에 오른 느낌을 전하고 있다.
“승경, 이보다 뛰어난 곳이 없다”
조선중기 문신 약포 정탁(鄭琢, 1526~1605)은 ‘관악산으로 스님을 찾아감 (冠岳尋僧)’이라는 시(詩)에서 “암자가 산속에 숨었으나 종소리는 감출 수 없다네. 누가 — 구름 뚫고 공색을 찾는가”하여 관악산을 멋지게 노래했다. 정탁이 말한 <반야심경>의 공(空)과 색(色)을 떠난 세계가 바로 신령스런 구슬을 모신 곳인 영주대이다. 또한 옥담 이응희(李應禧, 1579~1651)는 과천에서 은거하며 ‘관악산 영주대에 올라(上冠岳山靈珠䑓)’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기언 허목(許穆, 1595~1682)은 1678년 4월 84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관악산을 유람하고 “영주대는 세조(世祖)께서 예불하던 곳으로 관악산의 꼭대기에 있다”고 했고, 좌상(左相) 권시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주대 절정에 올랐는데, 산의 돌이 매우 위태롭고 험하였으므로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아찔하고 두렵소. 그러나 세상살이에 비한다면 오히려 평탄한 길이라 할 것이오”라고 말해 세상살이의 위태로움을 영주대에 오르는 것에 비유하기도 했다.
또 조선의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은 그가 쓴 ‘관악산 유람기’에 “관악산은 영주대가 가장 높은 봉우리인데 산의 승경(勝景)이 이보다 뛰어난 곳이 없다고 산승(山僧)이 말하자, 북쪽으로 올라 의상봉, 관악사와 원각사 두 절을 지나서 영주대 아래에 이르러 영주암(靈珠菴, 현 연주암)에서 쉬고, 마침내 영주대에 올랐다. 돌을 뚫어서 층계를 만들었는데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바위틈을 따라서 가장자리를 붙잡고 조금씩 올라가 빙 돌아서 대의 꼭대기에 이르니, 삼면은 막힘없이 전부 바라보이고 서쪽에는 깎아지른 벽이 서 있었다. 벽에는 불상이 새겨져 있고 다시 돌로 처마를 만들어 불상을 덮었다. 바위에 의지하여 단을 쌓았는데 돌을 쌓고 흙을 채워서 50여 명은 앉을 만하였으며, 바위 머리에 또 구멍을 파 등불 밝힐 곳을 만들었다”고 영주대를 둘러본 일을 소상하게 기록했다.

부처님 가피 충만하길 ‘기원’
괄허취여(括虛取如, 1720~1789)스님은 ‘관악산 영주대(冠岳山 靈珠臺)’라는 시를 지어 부처님의 가피 충만하시기를 기원했다.
“관악산에 올라서 한양 도성 바라보니(冠岳登臨望漢城)/ 푸릇푸릇 맑은 기운 멀리 우뚝 서리네(蔥蔥佳氣遠崢嶸)/ 북쪽 호위 삼각산은 천년동안 변함없고(三山擁北千年屹)/ 남쪽 두른 한줄기 강 만고에 푸르러라(一水圍南萬古淸)/ 팔만가지 장안에 햇살 가득 비추니(八萬長安天日照)/ 삼천세계 부처님 등불 밝게 빛나네(三千世界佛燈明)/ 멀리 바라보니 푸른 바다 아득한데(遙看碧海蒼茫外)/ 지는 해 노을 가에 백로가 비껴나네(落照紅邊白鷺橫)”
이처럼 창건부터 1700년대 중순까지 ‘연주대’는 ‘영주대’였음을 문헌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연주대로 바뀐 시기는 조선 후기로 보여 진다. <일성록>에 을묘(1795) 윤2월16일 정조대왕이 수원에서 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신하에게 묻길 “관악산이 저기에 있구나. 연주대는 어디인가?”하여 연주대 이름이 등장한다. 이처럼 고려의 유신들이 개성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워해 연주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어 보인다. 의상대사의 화엄사상에 비추어 불교적인 이름 영주암과 영주대로 고쳐 부르는 것은 어떨까?
새로운 기법 보현스님 불화 ‘주목’
또한 과천 연주암에는 보경당 보현스님이 근대 새로운 도상과 기법으로 1932년에 그린 불화가 있다. 보현스님은 축연스님을 비롯한 서울·경기지역 화사들의 계보와 화풍을 잇는 화사로서 주목되는 스님이다. 아마타회상도는 중앙의 설법인을 취한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뒤쪽에 가섭과 아난존자가 시립하고 있고 앞쪽에는 아미타불을 보관에 모신 관음보살이 연꽃위에 정병을 안치한 연꽃가지를 들고, 대세지보살은 보관에 정병을 모시고 흰 연꽃을 들고 있다. 그 옆에는 좌우로 미륵과 지장보살, 문수, 보현보살 등 6대보살이 협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신중도는 중앙에 금강저를 두 팔에 감싸고 합장한 동진보살이 화려한 깃털 투구를 쓰고 있다.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뒤쪽에 제석천과 범천, 일월천자, 동남동녀가 자리하고 있고, 앞쪽에는 사천왕, 여래팔부중, 산신 등 선신들이 자리하고 있다.
[불교신문3707호/2022년3월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