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꼭 가봐야할 사찰] 모든 중생이 부처님과 더불어 동등한 증심사와 규봉암
무등산 입석대와 서석대. 중머리재에서 약 1.5km 올라 무등산 정상을 바라보면 멀리 입석대와 서석대가 부처님이 길게 서계신 것 같다고 하여 이 고개를 ‘장불(長佛)재’라 했다고 전한다. 하늘은 손에 잡힐 듯 가깝고, 속세는 오히려 멀게 느껴지니 좋다.

무등산 자락에 자리한 광주 증심사(證心寺)는 통일신라 헌안왕 때 철감선사 도윤이 창건한 사찰이다. 선사는 중국 당나라로 가서 마조의 제자 남전 보원선사를 만나서 서로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도(道)가 있는 사람임을 알아보는 ‘목격도존(目擊道存)’으로 마음이 통하였다고 한다. 선사가 “깨달음은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며 신라로 돌아오자 남전은 “나의 법이 동국으로 들어간다”고 법을 인가했다.
➲ 중생이 본래 부처였음을 자각케 해
이런 선(禪)의 향기는 ‘증심사’ 절 이름에서도 나타난다. ‘증(證)’은 번뇌가 모두 없어지고 맺힌 것이 풀어져서 도를 얻은 것으로, ‘증심(證心)’은 본래 없는 마음자리로 돌아온 것을 말한다. 중생이 원래 부처였음을 자각하는 곳이 바로 증심사이다. 이 말은 무등산의 무등(無等)과 통한다. 불교에서 ‘무등’은 “부처님의 지혜는 비유할 만한 것이 없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없다”는 의미다. 또한 <법화의소>에서는 “모든 중생이 부처님과 더불어 동등하기 때문에 무등”이라고 했다.
그래서 ‘무등의 서원’은 중생과 부처님이 평등하여 하나가 되기를 맹세하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것을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백제 때 이 산에 성을 쌓자 백성들이 이에 편안히 살면서 즐거워 무등산곡(無等山曲)이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전한다. 이런 까닭에 광주 사람들은 옛날부터 항상 평등을 강조하는 삶을 살아 왔다. 특히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은 무등산의 평등사상을 실천하기 위한 고귀한 희생이었다.


증심사 일주문 옆 부도밭에 있는 ‘증심사 불량계답(佛糧契畓)’ 비석이 눈길을 끈다. 이 공덕비는 1920년 일제강점기 모든 것이 어려웠던 시절에 조석으로 부처님께 예불을 올릴 수 있도록 불자들이 계를 조직하여 논과 밭을 증심사에 시주한 선행을 기록한 비이다.
“우리 절 부처님께 양식을 올리는 계모임이 있으니 어찌 이 일로 선남자 선여인이 곧 부처님의 복을 받고 누리지 않겠는가?”했다. 참으로 큰 복전(福田)이다. 증심사의 철 비로자나불은 ‘불일증휘(佛日增輝)’로 1000년이 넘도록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닌 무등을 설하고 계신다. 지권인에 신체의 비례가 알맞고 긴 허리를 곧게 펴 결가부좌한 모습은 안정되고 당당하며 세련된 모습이다.
➲ 시대마다 다른 불탑
또한 증심사에는 시대마다 다른 불탑이 있다. 통일신라 3층 불탑은 문양 없이 이중 기단위에 비례에 맞게 탑신을 올린 형태이다. 아무런 장식이 없어 소박해 보이지만 지붕의 처마는 날렵하게 들렸고, 상륜의 앙화는 화려하게 조각되어 단조로움을 피했다. 고려 5층 불탑은 짧은 2중 기단에 5층 답신을 올렸다. 탑신 4곳에는 중앙에 사각으로 꽃문양을 새겨 넣었다.
깨어진 지붕과 탑신은 어려운 세월을 견뎌낸 불교를 보는 것 같다. 조선 7층 불탑은 지대석 위에 바로 탑신을 올리고 탑신 네 면에는 7층부터 2층까지 ‘옴마니반메훔’을 한 글자씩 범어로 새겨 넣었다. ‘옴! 여의주와 같은 연꽃이여, 청정함이여’라는 뜻으로 부처님을 찬탄했다. 특히 1층 탑신에는 연꽃을 새겨 넣어 진흙 속에서 피어나지만 물들지 않는 부처님을 표현했다.
증심사에서 시작한 무등산 산행은 더욱 ‘무등’에 대한 마음을 되새겨 보게 한다. 1187m 무등산은 <삼국사기>에 무진악(武珍岳), 고려사에 무등산(無等山), 동국여지승람에는 서석산(瑞石山), 조선후기에는 무당산(巫堂山)이라 했다. 또한 산 정상에 용암과 화산재가 갑자기 식어 만들어진 ‘주상절리대(柱狀節理帶)’가 있어 ‘무돌뫼’라 불렀다.
증심사에서 2km 남짓 걸으면 해발 617m 고개인 ‘중머리재’가 나온다. 나무가 자라지 못해 삭발한 스님머리처럼 보여 중머리 재라 불렀다고 한다. <광홍명집>에 “스님들이 일반인과 다르게 삭발하여 그 자태를 훼손하는 일이야말로 고매한 소박함을 남기는 것이며, 부모를 하직하고 애정을 끊는 일은 성인의 성스러운 곳으로 나아가려는 것이다”고 했다. 삭발은 “마음의 때를 제거하고 청정한 지혜를 얻기 위한 것이니, 삭발한 정수리에는 인욕(忍辱)의 옷을 입는다”고 했다.
중머리재에서 약 1.5km 올라 무등산 정상을 바라보면 멀리 ‘입석대와 서석대가 부처님이 길게 서계신 것 같다’고 하여 이 고개를 장불(長佛)재라 했다. 입석대와 서석대는 서있는 나의 영혼을 만난 듯, 부처님을 만난 듯, 태초의 고요함이 느껴진다. 먼 하늘은 손에 잡힐 듯 가깝고, 속세는 오히려 멀게 느껴지니 좋다.
무등산에는 수많은 사찰과 고승들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승방이 너무 좁아 좌선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견디기가 어렵다는 ‘부사의사(不思議寺)’, 나옹선사가 창건한 ‘염불암’, 3일만 머무르면 도를 깨닫는다는 ‘삼일암’, 금탑사, 은적사, 석문사, 금석사, 대자사, 규봉암 등등 수많은 절들이 골자기마다 빼곡히 들어 차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무등산에서 수행한 원효, 의상, 원광, 도윤, 지증, 도선, 지눌, 나옹 등 스님들은 하나 같이 한국불교의 근간을 세운 분들로 모두 무등을 강조했다.

➲ 지눌스님 참선했던 ‘규봉난야’
입석(立石)의 동쪽에는 규봉암(圭峰庵)이 있다. 무등산에 오른 정약용은 “규봉이라는 산은 두 봉우리의 깎아지른 모습이 마치 홀과 같다”고 했다. ‘규(圭)’는 옛날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신표로 내려 주던 것으로 조회를 할 때 천자에게 아뢸 말을 적어 커닝 페이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규봉암은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정혜결사 전 이곳에 ‘규봉난야(珪峰蘭若)’란 암자를 지어 참선을 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규봉암 뒤 광석대 남쪽에는 하늘의 신들이 불보살님을 향해 홀을 들고 예경을 하는 모습처럼 보인 삼존석이 있다. 고려시대 김극기는 무등산에 올라 “기이한 모양이라 이름을 붙이기 어렵더니, 올라와 보니 만상(萬像)이 평등하구나. 돌 모양은 비단으로 말라낸 듯하고 봉우리 형세는 옥을 다듬어 이룬 듯하다”고 했다. 바위 틈사이로 흐르는 물 한 모금에 모든 번뇌가 다 사라지는 듯 상쾌하다.
돌아보니 무등산의 신령스런 봉우리들은 의연히 푸른빛을 띠고 우뚝 솟아 있다. 빛 고을엔 언제나 빛 부처님이 계신다. 평등과 무등에 차별 없으며 미묘하신 말씀이 무등등(無等等)하다.
[불교신문3690호/2021년11월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