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사찰] 스님은 양처럼 몰려오고 꽃은 부처님으로 변신한 장성 백양사
깨달은 야차는 땅을 움직여 하늘 꽃비 뿌리네”
팔원스님 ‘법화경’ 독송하면
흰 양들이 무수히 몰려와서
‘백양사’ ‘환양선사’로 불려
나래 펼친 대웅전 팔작지붕
당당한 모습ㆍ우뚝 선 백학봉
한 눈에 들어와 탄성 저절로…

백양사는 백제 무왕 때 여환스님이 흰 바위산의 형상을 보고 ‘백암사(白巖寺)’로 창건하고, 이후 고려 덕종3년(1034) 중연선사가 크게 중창하여 ‘정토사’로 고쳤다. 고려 충정왕 2년(1350) 고려 제13국사인 각진국사가 사세를 확장시켰고, 1355년 무렵부터 다시 ‘백암사’로 고쳤던 것 같다. 이후 백암사는 조선 선조7년(1574)에 ‘백양사’로 바뀌었다.
당시 주지 팔원(八元)스님이 절에서 <법화경>을 독송하면 흰 양들이 무수히 몰려와서 백양사(白羊寺)라 부르게 되었고 양을 부르는 스님이라 하여 ‘환양(喚羊)선사’라 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환양선사가 양에게 깨달음을 주어 천상에 태어나게 했다”는 등 주먹구구식 설화가 있지만 그래도 경전에 근거한 설화여야 한다.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백암사로 몰려든 스님들을 비유하여 백양이라 했다. <법화경> ‘비유품’에 아들이 양이 끄는 수레를 타고 불타는 집을 무사히 빠져나오는 내용이 있는데 환양선사가 스님들을 깨닫게 하려는 ‘성문승교(聲聞乘敎)’ 이야기가 ‘백양’이고 ‘환양’이다. 그래서 백양사가 되었다.

환양선사 다음 주지를 한 소요태능(逍遙太能)선사는 태어날 때 어머니 꿈에 한 노파가 나타나 큰 수레를 끌고 갈 사람을 잉태했다고 축하하여, 선사의 이름을 ‘대승(大乘)’이라 지었다고 한다. <법화경> ‘비유품’에 양거, 녹거, 우거를 뛰어 넘는 큰 수레(大白牛車)를 ‘대승’이라 하는데, 13세에 백양사 출가는 <법화경>과 무관치 않을 것 같다. 선사는 부휴선사에게 경전을 배우고 서산대사에게서 선지(禪旨)를 깨우쳐 임제의 26세 적손으로 크게 선풍을 일으켰다. 선사의 열반게는 선기로 가득 차 있다.
解脫非解脫 해탈이 해탈 아니나니
涅槃豈故鄕 열반이 어찌 고향이랴
吹毛光爍爍 취모검 광채 번뜩이면
口舌犯鋒鋩 입속 혀 칼날 범하리
선사의 부도는 백양사 성보박물관에 있는데, 조선시대 범종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아름답다. 용뉴는 네 마리의 용이 보주를 받들어 선사의 깨달음을 나타내고, 네 면에는 각각 아홉 개의 연꽃봉오리와 가운데 위패형 액에는 ‘소요당’이란 당호가 있다. 두 마리의 용은 뿔을 세우고 힘찬 모습으로 위패를 지키고, 아래 물결 속에는 게, 거북이가 기어 다닌다. 부도를 범종형으로 만든 의미는 범종은 부처님을, 소리는 부처님의 음성을 상징하여 선사를 부처님처럼 모시고자 했다.

‘만암대종사 고불총림도량’
쌍계의 서쪽 극락교를 지나면 ‘만암대종사 고불총림도량’이라고 쓴 긴 돌기둥이 있다. 만암종헌선사는 1917년 주지로 와서 대웅전과 사천왕문 등 10여 년에 걸친 중창불사로 백양사를 크게 일으킨 스님이다. 대웅전 마당에서 바라보는 백암산 백학봉은 참 아름답다. 보는 위치가 또 대웅전과 멀면 주변이 산만하고, 너무 가까우면 백학봉이 가려 멋이 없다. 대웅전과의 거리조절에 성공하면 화룡점정(畵龍點睛)! 대웅전 팔작지붕의 나래를 펼친 당당한 모습과 우뚝 선 백학봉이 한 눈에 들어와 탄성을 자아낸다. ‘大雄殿(대웅전)’ 편액은 원교 이광사가 쓴 글씨로 ‘大’는 오른 발을 힘차게 내딛고 가는 사람처럼, ‘雄’과 ‘殿’도 함께 따라 움직이는 듯 글씨가 생동감과 재미를 준다.

대웅전 천장에는 용과 동자, 천인, 새가 하늘을 날며 불보살님을 찬탄·공양하는 모습이다. <화엄경>에 “불보살님께 올리는 공양은 불보살님의 자비심에 보답할 뿐만 아니라 내게 돌아오는 공덕 또한 무량무변하다”고 했다. 또한 대웅전 좌측에 있는 나한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두 눈이 먼 천안제일 아나율존자가 바늘에 실을 꿰려고 안간힘을 쓴다. 살짝 기울인 고개, 찡그려 주름진 얼굴, 곧 될 듯 될 듯 계속 허탕을 치니 계면쩍은 미소가 흐른다. 또한 등을 긁는 나한의 표정을 보면 내 등이 가려워 지는 듯하다. 참선을 하다말고 가려움에 지팡이로 긁어보지만 그곳이 아니듯 싶어, 입은 비뚤어지고 가려움을 참지 못하는 눈빛은 생사의 괴로움은 벗어던졌으나 가려움은 절대 못 참겠다는 듯 재미있다.
고불매 보면 日日是好日
백양사에 꽃으로 변한 부처님은 우화루(雨花樓) 옆 담 벽에 있는 고불매(古佛梅)를 법신불로 본 것이다. 법신불은 중생구제를 위해 두루 나타나는 자연으로 중생에게 이익을 준다. 고불매를 보고도 마음을 열지 못하면 법신불을 보고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황벽선사는 “한 번의 추위가 뼈 속까지 사무치는 것이 아니면, 어찌 매화가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겠는가?” 했다. 매화도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려고 뼛속 추위를 견디는 인욕바라밀을 하는데 하물며 인간이랴. 고불매의 수령은 약 400여 년 되었다고 한다. 소요태능선사가 처음 심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1918년 만암선사가 우화루를 짓고 옛 백양사 대웅전 앞뜰에 있었던 매화를 옮겨 심었다고 한다. 초봄에 활짝 피는 고불매는 참으로 두 선사의 그윽한 향기를 전해준다.
또한 고불매와 우화루는 곁에서 서로 윈윈(win win)하는 사이가 되었다. 우화는 불보살님의 공덕을 기리기는 하늘의 공양으로, <법화의기>에서는 “여래의 신통력으로 꽃비를 내린 것”이라 했다. <법화통략>에서는 “꽃비가 내리는 상서로움은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시기 직전, 삼매에 들어 계실 때 하늘에서 꽃이 비처럼 쏟아지는 상서로움이 있는 것을 우화서(雨華瑞)라 하는데, 이때 대지가 진동하는 것은 사찰을 지키는 도량신이 법의 눈으로 꽃을 피워 중생을 이롭게 한다”고 했다. 환양선사든, 소요선사든, 고불매든, 우화루든 이래저래 백양사와 <법화경>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여기에 우화루 주련은 금상첨화로 고불매와 딱 맞아 떨어지는 <벽암록> ‘제6칙 운문선사의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에 나오는 공안이다.
雨過雲凝曉半開 數峰如畫碧崔嵬
空生不解巖中坐 惹得天花動地來
“비 지나가고 구름 엉켜 새벽은 반쯤 열렸는데/ 여러 봉우리들은 그림 같이 드높게 푸르렀네// 수보리는 바위에 앉아 공을 생각지 않았는데/ 깨달은 야차는 땅을 움직여 하늘 꽃비 뿌리네.”
또 하나의 아름다움은 쌍계루를 백학봉과 함께 멀리서 볼 수 있는 징검다리이다. 불교에서의 다리는 계율을 지키고 법을 배워 윤회를 벗어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백양사의 징검다리는 계율을 상징하는 다리로, <등집중덕삼매경>에 “계율은 부처님의 법에 따라 확립되고 그것으로써 광명을 삼게 된다. 부처님의 법은 곧 계율의 다리로 보살의 도를 확립한다”고 했다. 징검다리를 건너듯 나의 행동이 계율에 어긋나지 않는지를 살펴야 한다. 다리를 중간 쯤 건너서 바라보면 쌍계루와 백학봉의 자태가 어우러져 연못에 비치는 아름다움은 그저 그만이다.
[불교신문3667호/2021년5월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