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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사찰] 스님은 양처럼 몰려오고 꽃은 부처님으로 변신한 장성 백양사

伯松金實根 2021. 11. 6. 08:00
“수보리는 바위에 앉아 공을 생각지 않았는데
깨달은 야차는 땅을 움직여 하늘 꽃비 뿌리네”

팔원스님 ‘법화경’ 독송하면
흰 양들이 무수히 몰려와서
‘백양사’ ‘환양선사’로 불려

나래 펼친 대웅전 팔작지붕
당당한 모습ㆍ우뚝 선 백학봉
한 눈에 들어와 탄성 저절로…
전남 장성 백양사 고불매. “고불매를 보고도 마음을 열지 못하면 법신불을 보고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는 비유가 있을 정도로 눈길을 끈다.

 

백양사는 백제 무왕 때 여환스님이 흰 바위산의 형상을 보고 ‘백암사(白巖寺)’로 창건하고, 이후 고려 덕종3년(1034) 중연선사가 크게 중창하여 ‘정토사’로 고쳤다. 고려 충정왕 2년(1350) 고려 제13국사인 각진국사가 사세를 확장시켰고, 1355년 무렵부터 다시 ‘백암사’로 고쳤던 것 같다. 이후 백암사는 조선 선조7년(1574)에 ‘백양사’로 바뀌었다.


당시 주지 팔원(八元)스님이 절에서 <법화경>을 독송하면 흰 양들이 무수히 몰려와서 백양사(白羊寺)라 부르게 되었고 양을 부르는 스님이라 하여 ‘환양(喚羊)선사’라 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환양선사가 양에게 깨달음을 주어 천상에 태어나게 했다”는 등 주먹구구식 설화가 있지만 그래도 경전에 근거한 설화여야 한다.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백암사로 몰려든 스님들을 비유하여 백양이라 했다. <법화경> ‘비유품’에 아들이 양이 끄는 수레를 타고 불타는 집을 무사히 빠져나오는 내용이 있는데 환양선사가 스님들을 깨닫게 하려는 ‘성문승교(聲聞乘敎)’ 이야기가 ‘백양’이고 ‘환양’이다. 그래서 백양사가 되었다.

 

백양사 대웅전과 백학봉.

 

환양선사 다음 주지를 한 소요태능(逍遙太能)선사는 태어날 때 어머니 꿈에 한 노파가 나타나 큰 수레를 끌고 갈 사람을 잉태했다고 축하하여, 선사의 이름을 ‘대승(大乘)’이라 지었다고 한다. <법화경> ‘비유품’에 양거, 녹거, 우거를 뛰어 넘는 큰 수레(大白牛車)를 ‘대승’이라 하는데, 13세에 백양사 출가는 <법화경>과 무관치 않을 것 같다. 선사는 부휴선사에게 경전을 배우고 서산대사에게서 선지(禪旨)를 깨우쳐 임제의 26세 적손으로 크게 선풍을 일으켰다. 선사의 열반게는 선기로 가득 차 있다.

 

解脫非解脫  해탈이 해탈 아니나니
涅槃豈故鄕  열반이 어찌 고향이랴
吹毛光爍爍  취모검 광채 번뜩이면
口舌犯鋒鋩  입속 혀 칼날 범하리

 

선사의 부도는 백양사 성보박물관에 있는데, 조선시대 범종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아름답다. 용뉴는 네 마리의 용이 보주를 받들어 선사의 깨달음을 나타내고, 네 면에는 각각 아홉 개의 연꽃봉오리와 가운데 위패형 액에는 ‘소요당’이란 당호가 있다. 두 마리의 용은 뿔을 세우고 힘찬 모습으로 위패를 지키고, 아래 물결 속에는 게, 거북이가 기어 다닌다. 부도를 범종형으로 만든 의미는 범종은 부처님을, 소리는 부처님의 음성을 상징하여 선사를 부처님처럼 모시고자 했다.

 

징검다리에서 본 쌍계루와 백학봉. 연못에 비친 모습도 일품이다.

 

‘만암대종사 고불총림도량’


쌍계의 서쪽 극락교를 지나면 ‘만암대종사 고불총림도량’이라고 쓴 긴 돌기둥이 있다. 만암종헌선사는 1917년 주지로 와서 대웅전과 사천왕문 등 10여 년에 걸친 중창불사로 백양사를 크게 일으킨 스님이다. 대웅전 마당에서 바라보는 백암산 백학봉은 참 아름답다. 보는 위치가 또 대웅전과 멀면 주변이 산만하고, 너무 가까우면 백학봉이 가려 멋이 없다. 대웅전과의 거리조절에 성공하면 화룡점정(畵龍點睛)! 대웅전 팔작지붕의 나래를 펼친 당당한 모습과 우뚝 선 백학봉이 한 눈에 들어와 탄성을 자아낸다. ‘大雄殿(대웅전)’ 편액은 원교 이광사가 쓴 글씨로 ‘大’는 오른 발을 힘차게 내딛고 가는 사람처럼, ‘雄’과 ‘殿’도 함께 따라 움직이는 듯 글씨가 생동감과 재미를 준다.

가려움은 절대 못 참겠다’는 듯 등을 긁는 것 같은 나한상(대웅전).

 

대웅전 천장에는 용과 동자, 천인, 새가 하늘을 날며 불보살님을 찬탄·공양하는 모습이다. <화엄경>에 “불보살님께 올리는 공양은 불보살님의 자비심에 보답할 뿐만 아니라 내게 돌아오는 공덕 또한 무량무변하다”고 했다. 또한 대웅전 좌측에 있는 나한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두 눈이 먼 천안제일 아나율존자가 바늘에 실을 꿰려고 안간힘을 쓴다. 살짝 기울인 고개, 찡그려 주름진 얼굴, 곧 될 듯 될 듯 계속 허탕을 치니 계면쩍은 미소가 흐른다. 또한 등을 긁는 나한의 표정을 보면 내 등이 가려워 지는 듯하다. 참선을 하다말고 가려움에 지팡이로 긁어보지만 그곳이 아니듯 싶어, 입은 비뚤어지고 가려움을 참지 못하는 눈빛은 생사의 괴로움은 벗어던졌으나 가려움은 절대 못 참겠다는 듯 재미있다.

 

 

고불매 보면 日日是好日


백양사에 꽃으로 변한 부처님은 우화루(雨花樓) 옆 담 벽에 있는 고불매(古佛梅)를 법신불로 본 것이다. 법신불은 중생구제를 위해 두루 나타나는 자연으로 중생에게 이익을 준다. 고불매를 보고도 마음을 열지 못하면 법신불을 보고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황벽선사는 “한 번의 추위가 뼈 속까지 사무치는 것이 아니면, 어찌 매화가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겠는가?” 했다. 매화도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려고 뼛속 추위를 견디는 인욕바라밀을 하는데 하물며 인간이랴. 고불매의 수령은 약 400여 년 되었다고 한다. 소요태능선사가 처음 심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1918년 만암선사가 우화루를 짓고 옛 백양사 대웅전 앞뜰에 있었던 매화를 옮겨 심었다고 한다. 초봄에 활짝 피는 고불매는 참으로 두 선사의 그윽한 향기를 전해준다.


또한 고불매와 우화루는 곁에서 서로 윈윈(win win)하는 사이가 되었다. 우화는 불보살님의 공덕을 기리기는 하늘의 공양으로, <법화의기>에서는 “여래의 신통력으로 꽃비를 내린 것”이라 했다. <법화통략>에서는 “꽃비가 내리는 상서로움은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시기 직전, 삼매에 들어 계실 때 하늘에서 꽃이 비처럼 쏟아지는 상서로움이 있는 것을 우화서(雨華瑞)라 하는데, 이때 대지가 진동하는 것은 사찰을 지키는 도량신이 법의 눈으로 꽃을 피워 중생을 이롭게 한다”고 했다. 환양선사든, 소요선사든, 고불매든, 우화루든 이래저래 백양사와 <법화경>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여기에 우화루 주련은 금상첨화로 고불매와 딱 맞아 떨어지는 <벽암록> ‘제6칙 운문선사의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에 나오는 공안이다.

雨過雲凝曉半開 數峰如畫碧崔嵬
空生不解巖中坐 惹得天花動地來
“비 지나가고 구름 엉켜 새벽은 반쯤 열렸는데/ 여러 봉우리들은 그림 같이 드높게 푸르렀네// 수보리는 바위에 앉아 공을 생각지 않았는데/ 깨달은 야차는 땅을 움직여 하늘 꽃비 뿌리네.”

또 하나의 아름다움은 쌍계루를 백학봉과 함께 멀리서 볼 수 있는 징검다리이다. 불교에서의 다리는 계율을 지키고 법을 배워 윤회를 벗어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백양사의 징검다리는 계율을 상징하는 다리로, <등집중덕삼매경>에 “계율은 부처님의 법에 따라 확립되고 그것으로써 광명을 삼게 된다. 부처님의 법은 곧 계율의 다리로 보살의 도를 확립한다”고 했다. 징검다리를 건너듯 나의 행동이 계율에 어긋나지 않는지를 살펴야 한다. 다리를 중간 쯤 건너서 바라보면 쌍계루와 백학봉의 자태가 어우러져 연못에 비치는 아름다움은 그저 그만이다.

[불교신문3667호/2021년5월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