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호의 한국의 불상] <30> 고려불상9 - 원 간섭기의 관음보살상과 지장보살상
특정 경전 따르지 않고
복합적인 성격 지녀 ‘특징’
관음보살상 지장보살상
함께 조성되는 경우 많아

고려시대에도 관음보살상은 전 시기에 걸쳐 조성되었는데, 구도의 예배 대상인 <화엄경> ‘입법계품’의 보타락가산 관음보살, 현세구복의 대상인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의 관음보살, 서방정토왕생의 대상인 아미타경전 류의 관음보살을 모델로 하였다. 그런데 원 간섭기(13세기 말과 14세기 전반)에 조성된 관음보살상 중에는 특정한 경전에 구애받지 않고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상들도 있다. 수월관음보살상을 조성한 후, 어떤 사람은 죽은 남편의 정토왕생을 간절하게 기도하였으며, 최이(崔怡, 최우崔瑀, ?~1249)는 외적이 물러가고 나라가 평안하기를 기원하였고, 채씨(蔡氏) 부인(이색(李穡, 1328~1396)의 외가 친척)은 원나라에서 죽은 아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등 다양한 마음을 담아 기도하였다.
관음보살상의 조성 목적에 복합적인 성격이 들어간 배경에는 모든 종파에서 주목할 정도로 관음보살신앙이 유행하였기 때문이다. 충렬왕 때 유가종의 혜영(惠永, 1228~1294)은 <백의해(白衣解)> ‘백의관음예참문(白衣觀音禮懺文)’에서, 화엄종의 체원(體元)은 <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병집략해(華嚴經觀自在菩薩所說法門別行疏幷集畧解)>와 <백화도량발원문약해(白花道場發願文略解)>에서, 천태종의 요원(了圓)은 <법화영험전(法華靈驗傳)>에서 각각 관음보살신앙에 대하여 주목하였고,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와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 등 선종 승려들도 관음보살상에게 소원을 빌었다.
1330년, 충청남도 서산(瑞山)의 부석사(浮石寺) 당주(堂主, 주존)로 조성된 금동관음보살좌상은 복합적인 조성 목적을 지닌 대표적인 예이다. 보살상은 승려 계진(戒眞)을 비롯하여 승속(僧俗) 32명이 현세구복과 서방정토왕생을 위해 조성한 것이다. 보살상은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설법인을 결한 채 가부좌하고 있다. 머리는 몸에 비해 큰 편으로, 앞쪽의 머리카락은 가르마를 중심으로 가지런하게 정리되었으며, 머리 양옆에서 내려온 머리카락은 어깨 위에서 꼬인 다음, 다섯 갈래를 이루고 있다. 왼쪽 허리 앞에는 14세기의 불상과 보살상에 많이 보이는 금구(金具)가 표현되어 있다.
한편 수월관음보살상이 법화삼매참회(法華三昧懺悔)의 예불 대상이 된 예도 확인되는데, 전라남도 강진의 고성사(高聲寺) 청동보살좌상이 그 예이다. 백련 결사가 시작된 백련사(白蓮寺)의 암자였던 고성사에서 출토된 청동보살좌상은 조성 배경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법화삼매참회의 예불 대상으로 조성된 관음보살로 추정된다. 보살상은 오른쪽 다리를 세운 윤왕좌(輪王坐)를 하고 있는데, 오른팔은 무릎 위에 걸치고, 왼손은 엉덩이 뒤쪽의 바닥 면을 짚고 있다. 보살상은 몸에 비해 머리가 약간 큰 편이며, 당당한 모습과 안정된 자세를 하였다. 넓은 이마, 둥근 눈썹, 가늘게 뜬 눈, 큰 코, 미소를 머금은 입을 가지고 있다. 상체는 표(裱, 목도리)로 어깨를 살짝 가렸으며, 하체에는 군의(치마)와 요포(腰袍, 요의腰衣)를 입고 있다. 가지런히 정리된 머리카락, 자연스러운 법의 주름, 살짝 힘이 들어간 엄지발가락 등에서는 섬세한 표현력이 엿보인다. 14세기 후반, 정추(鄭樞, 1333~1382)가 망자(亡者)의 백일(百日)을 맞아 법화삼매참회의 법석(法席)을 열고 (수월관음보살을) 예불하면서 수월관음이 감통하기를 기원했다는 기록은 법화삼매참회와 서방정토왕생을 실천신앙으로 삼았던 백련결사도량 고성사에서 참회의 예불 대상으로서 수월관음보살, 즉 청동보살좌상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높여 준다.
법화삼매참회의 예불 대상으로 조성된 관음보살상의 또 다른 예는 금동지장보살좌상과 함께 1351년에 조성된 해인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이 있다. 관음보살상의 복장(腹藏)에서 수습된 원문(발원문)이 <법화삼매참의(法華三昧懺儀)>의 발원 내용과 거의 일치하여 이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해 준다. 원래 경상북도 성주(星州)의 법림사(法林社) 대장전(大藏殿)에 봉안되어 있던 보살상들은 불상 없이 보살상으로만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관음보살상은 따로 만든 보관을 착용한 채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가부좌하고 있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올리고 왼손은 무릎 위쪽에 살짝 내려 엄지와 중지를 맞댄 채 설법인을 결하고 있다. 보살상은 비교적 긴 상체와 넓은 무릎을 가진 안정된 자세를 갖추고 있다.
또한 가늘고 긴 눈, 오뚝한 코, 적당한 크기의 입을 가지고 있다. 앞뒤쪽의 머리카락은 가르마를 중심으로 가지런하게 정리되었으며, 귀를 가로질러 내려온 머리카락은 어깨 위에서 꼬인 다음 양어깨를 따라 다섯 갈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높은 보계(寶髻)와 연주문이 표현된 보계 장식, 가지런하게 정리된 머리카락, 살짝 앞으로 내민 머리와 꼿꼿하게 세운 상체, 물방울과 패엽(貝葉) 모양의 장식이 달린 가슴 영락, 가슴 중앙의 법의(法衣) 가장자리를 따라 흘러내린 영락과 몸 전체를 덮고 있는 영락 등은 14세기 보살상에 보이는 전형적인 특징이다.
관음보살상과 함께 조성된 해인사 금동지장보살좌상은 백호(白毫)가 후보된 것을 제외하곤 거의 원형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보살상은 보관이 아닌 두건을 착용한 것만 다를 뿐, 얼굴 표정, 신체 비례, 법의 표현 방식이 관음보살상과 닮았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올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 위쪽에 살짝 내린 다음 엄지와 중지로 보주를 잡고 있다. 왼쪽 어깨 앞에는 대의를 고정하기 위한 구뉴(鉤紐) 장식이 있으며, 배 앞에는 군의의 띠 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지장보살상의 발원문은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견문이익품(見聞利益品)’의 내용과 유사하다.
관음보살상과 지장보살상은 1336년(지원至元 2년, 충숙왕 복위 4년)에 보살상 조성을 위한 권선(勸善)을 시작으로 16년간 모연(募緣)하여 1351년(지정 11, 공민왕 원년)에 조성되었다. 보살상 조성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인기(李隣起, 혹은 李仁起)와 그의 아들 이원구(李元具, 1293~?), 이포(李褒, 1287~1373, 이조년李兆年의 아들) 등 성주 이씨 가문, 배문적(裴文迪) 등 성주 배씨 가문, 여위충(呂渭忠) 등 성주 여씨 가문을 중심으로 한 4천여 명이다. 권선문과 발원문에 의하면, 관음보살상은 임종 때 서방정토왕생을 위하여, 지장보살상은 현세구복과 정토왕생을 위하여 각각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관음보살상과 지장보살상이 한 세트로 조성된 배경은 진억(津億)이 12세기 초에 지리산(智異山) 오대사(五臺寺)에서 서방정토왕생을 목표로 주도한 수정(水精) 결사에서 찾을 수 있다. 결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15일마다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에 따라 나무 간자(簡子)를 던져 자신의 수행 과보(果報)를 확인하고 악보(惡報, 나쁜 과보)가 나오면 서방정토왕생을 위하여 참회 수행하였다. 수정 결사에서는 지장보살신앙과 연관된 점찰(占察) 법회가 개최된 것으로 보아 정토왕생을 위한 아미타불상은 물론, 지장보살상도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전통이 이어져 해인사 보살상들과 같이 관음보살상과 지장보살상이 한 세트로 조성되거나 이들 보살상과 아미타불상이 결합된 아미타불삼존상이 고려말 조선초에 유행하게 된다.
한편 <점찰선악업보경>에 따른 점찰 법회가 유행하면서 지장보살상이 독존으로도 조성되었는데, 고려시대 1346년(충목왕 2)부터 조선시대 1398년(태조 7년)사이에 43번의 생회(栍會, 점찰 법회의 일종)가 열린 전라북도 고창의 선운사(禪雲寺)는 고려말 조선초의 지장보살도량(道場)으로서 가장 주목되는 곳이다. 지금도 선운사에는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솔암(兜率庵)의 금동지장보살좌상, 참당암(懺堂庵)의 석조지장보살좌상, 지장보궁전(地藏寶宮殿)의 금동지장보살좌상이 남아 있다. 이 중 참당암 약사전의 석조지장보살좌상은 보수를 거치면서 얼굴이 밋밋해졌으나 세모 형태의 특이한 입술, 유난히 큰 손과 상대적으로 작은 발을 지닌 것으로 보아 원래는 개성 있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살상은 양감이 거의 없는 상체, 간략하게 처리된 무릎의 법의 주름, 형식화된 목걸이 장식을 통하여 점찰 법회(생회)가 유행하던 고려말 조선초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른손은 가슴 중앙에서 보주를 잡고 있으며, 왼손은 손등을 위쪽으로 한 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보살상이 조성 당시부터 참당암(대참사大懺寺)에 봉안되어 있었다면, 지옥에 빠진 망자를 구제하던 조선시대의 지장보살상과 달리 현세구복과 정토왕생을 위한 점찰 법회의 예불 대상으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보살상에서 망자를 구하기 위해 지옥의 문을 부술 때 사용하던 육환장(六環杖)을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지옥의 망자를 구제하는 역할보다 점찰 법회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불교신문3668호/2021년6월1일자]